[서울 말고] 정나리 | 대구대 조교수
1488년 겨울 최부는 부친상을 당한다. 도망간 노비를 찾는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파견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곧장 배를 구했다. 심상찮은 날씨라 제주바다를 아는 이들이 말렸으나, ‘주자가례’의 해석을 둘러싼 갑론을박 끝에 결국 아전, 호송군, 격군, 관노 등 총 43명이 상선한다. 상을 당한 사람은 하나인데, 무관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따르니 그도 ‘실리 없다’ 한다. 하지만 뱃길은 위험하고 큰 배에는 노를 저을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의 신념체계, 지배계급의 유교적 세계관을 실현하기 위해선 ‘타자’의 노동과 희생, 동의와 협조, 즉 ‘존재의 나눔’이 필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비바람이 몰아쳤고 산만한 파도가 배를 위협하였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최부를 원망하였다. 노를 저으라 해도, 어차피 죽을 거 힘을 왜 쓰냐며 손을 놨다. 소년급제자 최부의 명분과 명이 아무 소용 없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최부도 상복으로 갈아입고 하늘에 빌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다. 배의 물을 퍼내고 돌섬만 피하면 될 것 같으니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살길을 도모하자 격려한다. 성종에게 제출하는 보고서에서 그는 136일 만에 명나라를 거쳐 모두가 멀쩡히 귀환할 수 있었던 건 먼저 황제의 은혜 덕분이고, 그것은 또 임금의 은덕 때문이라 결론 내린다. <표해록>은 무엇보다 아버지와 왕이 중심인 상징계를 강화하는 지극한 충효의 여정이다.
<하멜 표류기>는 하나님이 동행하는 제국주의적 기업가 정신의 기록이다. 1653년 여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상선 스페르베르호는 대만에서 나가사키로 가던 중 제주에 난파되었다. 효종은 하멜 일행에게 살 궁리를 마련해주었다. 서울에서는 친위대에 그리고 다음 7년간은 전라병영에 소속되었으나 마지막 3년은 기근이 심해 뿔뿔이 흩어져 구걸까지 했나 보다. 애초 64명이었던 선원들은 13년 동안 16명으로 줄어든다. 목숨을 건 치밀한 탈출에 성공한 후, 서기였던 하멜은 그간 못 받은 임금을 청구하고자 보고서를 작성한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 위원들이 암스테르담에서 이를 읽고 이교도들과 어떤 거래를 할 수 있을지 이해득실을 가늠해보지만, 조선의 문은 200년 뒤에 열린다.
너도나도 스마트폰으로 해외주식을 한다 하고, 명절에 할아버지가 배달 음식을 두고 조용한 제사를 지내는 걸 보면 우리는 멀리 오긴 했지만 여전히 최부와 하멜의 유산을 적잖게 지고 있다. 영화 같은 두 표류는 예상치 못한 틈도 열어낸다. 예컨대, 하멜 일행이 회사로부터 받게 되는 위로금도, 최부 일행에게 내려진 황제의 선물도 차등적으로 책정된다. 일등항해사와 하급갑판원, 고위관리와 노역자의 ‘정당하다 합의된 몫’이 다른 건 동서고금 대체로 ‘자연화’된 현실. 그런데 갑자기 분배의 원리가 바뀌는 순간이 있다. 배가 탈탈 털리고 가까스로 낯선 해안에 내렸을 때, 최부는 비장하게 ‘밥 한 그릇을 얻으면 나누어 먹고 서로 보호해서 한 사람이라도 잃지 말라’ 한다. ‘역사에 길이 남을 <표해록>을 쓸 자는 나이니 내가 다 먹겠다’도 아니고 ‘수장 다섯, 중간관리자 셋, 노동자 한 숟가락씩 먹으라’도 아니다. 로테르담 출신 47세 조타수의 월급은 14플로린, 25세 급사 5플로린으로, 세 배 가까운 차이가 있다. 그들은 서울에서 매달 쌀 70캐티(약 42㎏), 강진에선 50캐티를 받다가 그마저 없을 때, 교대로 식량을 구해 와서 ‘똑같이 분배’한다. 다 죽게 생긴 극한상황에서 권위주의, 능력주의, 가족주의를 초월한 나눔이 난데없이 튀어나온다.
우린 얼마나 더 표류해야 위계와 위세에서 자유로운 ‘존재의 나눔’을 실험하나? 소득, 자산의 격차가 마구 벌어지도록, 또 그것이 존재의 가치와 존엄의 문제로 전도되도록 내버려두는 세계를 유산으로 남길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