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지난 21일 오후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 티브이 토론회에 나와 발언하고 있다.오른쪽 아래는 수어통역 화면.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숨&결] 이길보라|영화감독·작가
많은 사람들이 ‘수어노래’를 통해 수어를 접한다. 농인 부모에게서 수어를 배운 나도 수어노래를 하곤 했다. 학교 축제에서 사복을 멋지게 차려 입고 무대에 서서 귀로 들려오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가사를 수어로 옮겼다. 선율에 맞춰 고개를 흔들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당기는 동작을 반복하면 마치 노래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수어를 할 줄 안다는 건 자랑이 되었다. 그 사이에 농인은 없었다. 내가 심취한 것은 수어로 퍼포먼스를 하는 나 자신이었지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당사자가 아니었다. 철저히 청인 중심의 수어노래였다.
자라면서 수어노래에 별 감흥이 없는 농인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농인은 청각을 통해 감각하는 노래에 맞춰 수어를 할 수 없다. 어디서 전주가 끝나고 가사가 시작되는지, 가사 내용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농인과 청인이 함께 수어안무를 한다 해도 농인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인을 따라해야 한다. 노래를 부르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수어노래가 철저히 청인 중심의 콘텐츠인 이유다.
수어노래를 볼 때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수어노래를 통해 수어를 접하고 본격적으로 배우는 이들도 있지만 수어를 사용하여 감동적이라며 눈물을 흘리고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와 나는 일상 속에서 수어를 사용한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매일같이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건 아니다. 동정과 연민은 대상화로부터 시작된다. 무엇보다 수어로 안무를 해봤자 비장애 중심 사회에서의 농인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 농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노래도 노래지만 질 높은 수어통역이 먼저다. 유권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농인들은 어느 후보가 어떤 정책을 펼치는지 알기 어렵다. 통역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선거관리위원회 주관 대선 후보 1차 토론회에서는 방송사마다 수어통역을 제공했다. 1명의 통역사가 사회자를 포함한 모든 후보자의 말을 통역하는 방식이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통역 형식이다. 날카로운 질문을 한 후보가 기호 3번인지, 애매한 답변을 한 것이 1번인지 2번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동시통역은 집중력이 쉽게 떨어지기에 20~30분 간격으로 통역사를 교체해야 하는데, 2시간이 넘는 토론회를 1명의 통역사가 전부 통역한 방송사도 있었다. 모든 걸 차치하더라도 통역 화면 크기가 작아 수어를 명확히 볼 수 없다. 농인들은 화면 앞에 가까이 앉아 통역 화면을 봤다가 고개를 올려 화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으면 다시 고개를 내려 자막을 읽어야 한다.
이에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인재영입위원회 부단장이 후보자별로 통역을 제공하는 실시간 중계를 했다. 화면을 5개로 분할해 사회자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각각 2명의 수어통역사를 세웠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손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저작권 문제로 티브이(TV)토론 영상을 송출할 수 없어 화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자세로 말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방송해 접근성이 떨어지기도 했다. 농인들은 컴퓨터에 화면을 2개 띄우거나 휴대폰 등의 기기를 여러대 활용하여 시청했다. 통역의 질이 높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복지티브이>가 형식을 이어받아 향후 토론회에 전면 수어통역을 제공하여 송출하겠다고 했으니 의미 있고 중요한 시도였다.
이처럼 농접근권은 쉽게 보장되지 않는다. 어렵고 복잡하다. 내용과 형식을 함께 고민해야 하며 농인 당사자의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 다시 수어노래로 돌아가보자. 청인의 입장에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노래가 수어노래다. 그렇다면 청각 외의 감각으로 소리를 감지하고 더 넓은 시야를 지닌 농인에게 노래란 무엇일까. 다른 감각을 가진 이들의 입장을 생각하는 대선과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는 대통령을 나는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