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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나는 12년차 비정규직 강사입니다 / 임하정

등록 2022-02-23 17:53수정 2022-03-16 14:13

적어도 인간다운 삶은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의식주는 해결하고 살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며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정규직이기에 생활비가 적게 드는 것도 아니고, 희망이나 꿈을 품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임하정 | 영어회화전문강사

밀레니엄 시대라 환호하던 2001년, 저는 33살의 나이로 영어영문학과 편입 시험을 치렀습니다. 면접을 보셨던 교수님께서 나이를 물으시더니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하시며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침 일찍 도시락을 준비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학교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했습니다.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며 직장 생활을 함께 했던 10대에는 밤새워 공부하는 것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영어 과목을 좋아했는데, 제가 처한 열악한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을 상상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씨앗을 드디어 밭에 심은 기분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이후, 이력서에 ‘영문과 졸업’이라고 쓰고 시골 초등학교 방과후 영어 강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가 정한 강의료는 너무 작았고, 그나마 방학이면 아예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 일을 그만두고 서울 한 대학교에서 영어 교사 양성 과정인 테솔(TESOL)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영사기사로 다른 지방에 있었기에, 친정어머니께 아이를 부탁하고 한달 동안 서울에서 생활했던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또 다른 배움을 경험하며 교수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이 출산 후,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 아이를 키우며 논문을 쓰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사이 남편은 젊은 나이에 일자리를 잃어 취업을 위한 직업교육을 받으러 떠났고, 저는 시골의 한 초등학교 영어체험실에 내국인 영어 강사로 취직을 하였습니다. 외국인 2명과 내국인 2명의 강사가 전교생들을 대상으로 여러 주제의 활동을 체험하며 방과후 영어 수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학교는 예산이 부족하다며 내국인 강사를 갑작스럽게 해고하였습니다. 놀란 가운데 다행히 기간제 교사로 1년을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해에는 예산이 더 줄어 외국인 강사마저 떠났는데, 그때도 저는 운좋게 1년 계약을 연장했습니다. 해마다 예산에 따라 달라지는 신분과 불안한 근로 조건으로 겨울방학이 오면 몸살을 앓곤 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영어회화 전문강사 자리에 결원이 생겨 시험에 응시했고 채용되었습니다. 정규 교과 시간에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평가권을 갖는 ‘영전강’은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며 그렇게 4년이 지나면 퇴직 처리되는 비정규직 강사입니다. 계속 일하려면 신규로 시험에 응시해야 합니다. 고용 시점을 기준으로 4년마다 퇴사와 입사, 시험 응시와 계약을 거듭하며 저는 현재 일하고 있는 이곳에 근무한 지 만 12년이 지났습니다.

매년 학생들과 학부모, 동료들로부터 평가를 받고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임용고시’의 문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용불안을 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업 현장에서 전문성과 신뢰를 쌓아왔음에도, 어느 날이면 동료를 감독관 혹은 수험자로 두고 시험을 치르거나 평가해야 합니다. 주무 부처인 교육부와 교육청은 서로에게 공을 떠넘기며 이 문제에 관한 책임있는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사이 많은 강사들이 교육 현장을 떠났고, 남은 3분의 1 정도의 강사들은 또다시 추운 겨울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일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인간다운 삶은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의식주는 해결하고 살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며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정규직이기에 생활비가 적게 드는 것도 아니고, 희망이나 꿈을 품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나치의 ‘유대인 표식’ 같은 비정규직이라는 꼬리표는 사회 곳곳에서 차별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이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듯한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비정규직을 2등 시민으로 내모는 그 차별의 선은 우리 사회에서 점점 더 굳어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이라는 ‘고립된 섬’이 끊임없이 변방으로 내몰리면 그 병폐는 언젠가 예상할 수 없는 큰 사회문제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우리는 인구 절벽의 현실 앞에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만들고 수많은 돈을 쏟아부었지만, 고용불안 해결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현실을 확인합니다.

누구도 불안한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 학생들은 어떤 일을 선택하든지 그것이 자신의 능력과 소질에 맞는 일이라면, 존중받아야 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또한 비정규직 없는 사회에서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이 그리 멀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지난해 주최한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입니다. 다음주에는 다른 수기가 실립니다. 수상작 일부를 해마다 <한겨레>에 게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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