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투쟁에 도움을 준 이들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부산/김혜윤 기자
[숨&결] 정민석 | 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
변희수 하사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었다. 그사이 전역 처분은 취소되었지만 기쁨을 함께 누릴 사람은 없다. 애도와 다짐만이 남았다. 지난 2월25일, 변 하사를 만나기 위해 청주로 내려가는 날, 부산에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복직 행사가 열렸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무력감에 사로잡혔던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변 하사가 그토록 바랐던 ‘복직’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무려 37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온 김 지도위원의 끈질긴 투쟁에 감사를 느낀 하루이기도 했다.
변희수 하사를 만나기 위해 납골당으로 향했다. 지극히 평범한 난초가 그려진 납골함에 ‘변희수’라는 이름과 ‘하사’라는 그의 계급이 새겨 있었다. 1998년 태어나 2021년 삶을 마감했다는 기록만이 변희수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곳, 그의 시간은 멈춰진 채 구석진 좁은 방에 머물고 있었다. 꽃 하나 두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삭막한 납골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많지 않았다. 안부 인사와 함께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뿐.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닌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변 하사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다시 이동을 했다.
불 꺼진 집에서 마치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과일을 한가득 내어주셨다. 벌써 1년이 되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어색한 자리였다. 몇 개월 전 방문했을 때는 왜소한 몸에 울기만 하시던 아버지와 함께 술을 마시기라도 했는데 이번엔 뵙지 못했다. 순직 결정이 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에 어머니는 장례식장에서 보지 못했던 잠깐의 웃음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기일에 납골당에 가실 거냐는 질문에 평소 희수가 좋아했던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겠다고 하신다.
드시지도 않을 음식 앞에서, 먼저 간 자식을 원망하며, 자녀의 성별 정체성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모님의 하루는 여전히 2021년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여성으로서, 군인으로서 살고자 했던 희수의 마음을 언젠가 이해해주겠지’, 그때가 되면 부모님의 시간도 다시 흘러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순직 결정이라는 소식과 함께 다시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드리며 집을 나섰다.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영상으로 뒤늦게나마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행사 소식을 접했다. 한진중공업 작업복을 입고 당당히 연단에 오른 그는 북받치는 감정을 다잡으며, 동료 조합원과 참석자들에게 “더 이상 울지 않고, 더 이상 죽지 않는 미래로 거침없이 당당히 가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그 말에 용기가 나면서도, 나의 시간이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스스로 되물어보기도 했다. 가늠할 수도 없는 그 37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동료를 떠나보내야 했던 김 지도위원의 절절한 외침에 변희수를 애도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연설 끝 무렵 우리 사회의 차별당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차별하는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목숨 걸고 외치는 말을 들어야 차별이 없어진다며 정치인들에게 호소했다. 변 하사가 목숨 걸고 외쳤던, 누구보다 간절히 말했던, 군인이 되고자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했던 그 말을 국가가, 정치가 듣지 않았기 때문에 차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죽음으로 차별을 알아챈다는 것이 너무나 서글픈 일이지만, 김 지도위원이 말했던 더 이상 죽지 않는 미래로 거침없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변 하사가 남긴 숙제, 그리고 그가 꿈꿨던 세상이 무엇이었는지 잊지 않아야 한다.
다시 심기일전해보자. 그리고 김진숙이 살아왔던 37년 이후에, 아직 오지 않은 그 미래에,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평등을 위해 남은 과제가 무엇인지 그때 웃으며 이야기해보자. 변희수 하사의 살아 있는 웃음소리는 듣지 못하겠지만, 그 미래엔 살아남은 우리들이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