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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다시 을로 돌아간다

등록 2022-03-09 19:15수정 2022-03-10 02:32

20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 4일 오전, 한 할머니가 인천 옹진군 덕적면 진1리 다목적회관에 마련된 사전투표소로 향하고 있다. 덕적도/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 4일 오전, 한 할머니가 인천 옹진군 덕적면 진1리 다목적회관에 마련된 사전투표소로 향하고 있다. 덕적도/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숨&결]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이것은 ‘갑’이라 불리는 ‘을’에 대한 이야기. 의사 없는 시골 마을에 마을진료소를 설치해 달라 제안한 지 1년. 을은 대답 없는 시청 앞에서 마을진료소 설치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했다. 얼마를 서 있었을까. 시청 정문에서 한 사람이 을에게 다가왔다. “저는 시청 공무원입니다. 추운데 왜 여기에 서 계세요?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얘기하세요.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너무 쑥스러워서 “괜찮습니다”라고 하니 “무슨 말씀이세요. 이곳은 시민이 주인인 도시 아닙니까!” 하며 을의 손을 끌고 시청 안으로 안내를 한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물론 몽상이다. 덕분에 이내 기분이 가라앉는다. 을은 생각했다. 을의 앞을 지나가던 공무원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불편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시민이 그들 앞에서 추위에 떨며 1인 시위를 하는 풍경은 이상하리만치 너무 당연했다.

지역 사안 때문에 시청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온 적 있다. 저녁 모임이 좋았지만 담당 공무원들의 일과 시간에 일정을 잡아야 해서 오후로 정했다. 직장에도 미리 휴가를 냈다. 하지만 약속 당일 갑자기 연락이 왔다. 다른 일정이 생겨서 약속을 미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을은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또 휴가를 낼 순 없었기 때문이다. 행정가들의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시민들의 ‘직장이 있는 삶’이 매번 양보되어야 하는 이런 관행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시에서 했던 수많은 공청회 중에서 저녁에 진행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낮에 일을 쉴 수 있는 특별한 시민들만이 공청회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선거가 끝나간다. 투표장에 들어서기까지 갑이었던 우리는 투표장을 나오는 순간 다시 을로 돌아간다. 당선이 유력했던 두 후보의 공약집을 봤다. 뭘 해주겠다는 공약은 있어도 뭘 해보자는 제안은 안 보인다. 시민들에게 무언가 할 것을 요구하는 공약은 단 하나도 없다. 희한한 일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라면서 대한민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국민은 아무런 역할이 없다. 그들이 제시하는 청사진대로라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시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뽑아주면 내가 다 알아서 해주겠다는 것. 그것이 선거이다. 그들의 민주주의에는 주체적인 시민이란, 없다.

우리를 대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대변하는 정치가 어떻게 힘을 행사하는가보다 ‘우리가 어떻게 힘을 행사할 수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자신이 지지하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이런 ‘우리'가 실종된 세상이다. 사드를 배치하겠다 혹은 하지 않겠다는 공약보다 중요한 것은 그 결정권을 어떻게 시민들에게 줄 것인지에 대한 약속이다. 하지만 시민들을 어떻게 공론장으로 불러올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내가 다 해주겠다’는 약속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약속의 결과는 17%란 처참한 숫자가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숫자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 이행률(2021년 5월 기준)이다. 행정은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분명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이 갑이고 시민들은 늘 을이다. 갑이라고 불린다 해도 을인 것은 변함이 없다. 정말 행정의 주인이 시민이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의 권리를 갖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결정권을 가져와야 한다.

류 할머니는 무릎주사를 맞기 위해 의자에서 바닥으로 옮겨가는 데도 숨을 헐떡이며 눈가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런 몸으로 며칠 전 관절약을 타러 보건지소에 다녀왔다. 300미터도 안 되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휴진이었다. 이제 할머니는 투표하러 같은 길을 또 가야 한다. 투표소가 보건지소 옆 주민센터에 있기 때문이다. (문턱 없이 치료받을) 권리가 사라진 길 위에서도 (투표의) 의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길에서 할머니를 반긴 것은, 관공서마다 붙어 있는 ‘시민이 주인입니다’라는 지난 선거 구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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