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혁신] 김진화 | 연쇄창업가
윤석열 당선자의 첫 공식 일정이었던 현충원 참배가 늦어진 건 갑작스레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축하 전화. 당선 수락 5시간 만에 백악관에서 걸려 온 전화는 꽤나 이례적이라고 한다. 양국 정상이 만나 함께 풀어야 할 숙제가 많거나, 앞으로 친하게 지낼 사이라는 걸 대외적으로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됐든 유례없는 초박빙의 개표가 새벽녘까지 이어져 쫄깃했던, “길었던 밤”의 여운과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걸려 온 백악관의 전화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마도 일과를 마무리할 무렵, 한국의 대통령 당선자에게 축하 전화를 했을 바이든 대통령은 그날 오후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공표했다. ‘디지털 자산의 책임 있는 개발 확립’이라는 제하의 이 행정명령을 알리는 백악관 보도자료는 최초의 범정부적 대응임을 강조한다. 소비자 보호와 금융 안정화는 물론이고 국가 안보와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까지 목표로 한다니, 그야말로 ‘범정부적’ 어젠다가 아닐 수 없다.
말 많고 탈 많은 가상자산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발동된다고 하니 자연스레 규제를 떠올리는 예측이나 보도가 많았다. 하지만 발표된 내용은 부처 간 협력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과 필요한 보고서가 무엇인지, 제출 시한은 언제인지 등이 골자다. 눈여겨볼 부분은 상무부에 대한 주문이다. 다른 부처와 협력을 통해, 미국이 이 분야에서 리더십과 기술력을 선도할 수 있는 프레임워크를 만들어 오라는 것. 규제와 경쟁 촉진을 혼동하고 규제와 진흥을 두부모 썰듯 나누는 데 익숙한 한국적 규제 환경에서 보자면 다소 낯설기까지 하다.
행정명령은 행정부의 입법권이 제한된 미국에서 대통령의 국정과제를 신속하게 관철하는 독특한 통치 수단으로 평가받는다. 원칙적이고 장기적으로는 의회의 입법 과정을 거치는 게 바람직하지만, 토론이 길어져 시의성을 놓치게 될 우려가 있거나, 토론을 위한 충분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은 경우 행정명령이 요긴할 수 있다.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다. 범정부적으로 가상자산이라는 새롭고 어려운 분야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만드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된 셈이고, 향후 이를 바탕으로 의회에서 정식 입법을 거치게 될 전망이다. 사실 미국에서는 2013년 상원청문회를 시작으로 의회와 연방기관 등의 개별적 접근이 비교적 활발히 이뤄져온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이번 행정명령이 공표된 게 아닌가 싶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당의 대선 후보 역시 가상자산에 대한 여러 공약을 쏟아냈다. 윤석열 당선자도 과세 기준 상향, 아이시오(ICO·가상자산 발행) 허용 등 당근성 공약을 열거한 바 있다. 다만 바이든의 행정명령에서 돋보이는 범정부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공약을 했으니 무턱대고 이행에 나설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근본부터 다시 살필 일이다. 새롭게 등장한 기술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법무부 파견 검사들을 동원해 탄압하려 했던 문재인 정부의 전근대적 실수를 다른 방식으로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바이든의 행정명령을 보며,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 떠올랐다. 인터넷이 막 상업화되던 시절, 체계적인 초고속인터넷 국가 전략이 없었다면 이후 우리의 산업구조는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윤석열 당선자에게 조속한 만남을 제안한 바이든 대통령의 어젠다 중에는 공급망 등 경제 분야 협력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마침 이번에 발표된 행정명령에는 가상자산 대응을 위한 국제적 협력도 강조돼 있다. 5월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정부의 범정부적 가상자산 대응책에 조응하는 우리 정부의 계획도 함께 테이블에 오르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