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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착한 노쇼’ 따라 하기

등록 2022-03-13 19:04수정 2022-03-14 02:00

[서울 말고] 박주희 | ‘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1. 애정하던 여행 관련 앱들을 열어본 지가 까마득하다. 스마트폰 앱을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뽀얗게 먼지가 묻어날 듯하다. 코로나로 발이 묶인 뒤 잊고 지내던 공유 숙박 앱 에어비앤비를 슬며시 열었다. ‘착한 노쇼’를 따라 해본다. 지금은 갈 수 없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숙소를 예약한 뒤 실제로는 방문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시민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키이우’를 검색하니 지도 위에 숙소들이 빼곡히 뜬다. 지도 속 키이우는 여전히 평화로워 보인다. ‘집을 예약해서 우크라이나 난민을 도와주세요’라는 안내문을 보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눈에 들어오는 숙소 하나를 골랐다. 방 하나짜리 아담한 아파트인데 놀랍게도 5일 동안 예약이 꽉 차 있다. 숙소 이용 후기를 보니, 지난달까지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진짜 이용 후기가 올라와 있고, 3월에는 미국 텍사스와 뉴저지, 불가리아에서 남긴 응원의 글들이 보인다. 세계 곳곳에서 착한 노쇼 기부에 동참하는 이들이다.

예약 가능 일을 골라 2박을 예약하고 결제를 마쳤다. 숙소 예약에 으레 따라붙는 수수료가 ‘0’원이다. 에어비앤비가 예약자에게 수수료를 받지 않고, 숙박비 전액을 호스트 몫으로 보내 이 기부활동을 응원하고 있어서다. 이달 초 이틀 동안만 무려 6만1천건이 넘는 우크라이나 숙소 예약이 이뤄졌다고 한다.

예약 후 호스트 라리사(정확한 발음은 아니겠지만)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우크라이나를 여행하며 당신 집에 머무르게 될 날을 기다린다. 평화를 빈다’고. 그곳 시각이 새벽 2시쯤이었는데 바로 메시지 답장이 왔다. ‘따뜻한 희망과 도움을 주어 감사하다. 조국과 세계를 위해 기도한다. 평화롭고 안전할 때 기쁘게 맞이하겠다’고. 클릭 몇 번으로 전쟁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직접 후원하는 이 선한 연대의 마음이 사람과 사람을 엮어 퍼져나가는 중이다.

#2. 착한 노쇼 캠페인이 세계를 돌아 산불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경북 울진까지 닿았다. 동해안 산불 피해를 안타까워하는 시민들이 착한 노쇼 기부에 나선 것이다. 한 낚시단체의 회원들이 피해지역에 숙박업소의 방을 장기간 예약한 뒤 방문하지 않고, 이재민이나 소방관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내놓았다. 숙박업소 주인도 숙박비 절반을 깎아줘 기부에 동참했다.

‘돈쭐 기부’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울진의 한 중국집에서 산불 작업자들과 이재민들에게는 음식값을 받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이 나섰다. 전국 곳곳에서 배달받지도 않을 음식값을 결제하며 음식점 주인을 응원했고, 주인은 그 돈을 모아 이재민들에게 써달라고 다시 기부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산불 진화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울진에는 여전히 매캐한 냄새가 자욱한 가운데 헬기가 쉼 없이 물을 퍼나르고 불타고 있는 산속에는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이 불과 싸우고 있다. 전국에서 모인 소방관들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개인 트럭에 소방용수를 실어 나르며 진화 작업을 돕는다. 그리고 현장 주변에는 자원봉사자 수천명이 번갈아가며 진화 작업자들의 식사를 도맡는다. 재난 현장마다 가장 먼저 달려오는 구호단체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생업을 놓고 찾아와 일손을 보태는 시민들도 줄을 잇는다. 현장에는 오지는 못해도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준 시민들만 55만여명에 이른다. 유명인들도 통 큰 기부로 함께한다. 언제나 사람이 사람을 돌보는 힘으로 재난을 견뎌왔듯 동해안 산불 현장에서도 그 돌봄을 목격한다.

세계인들이 보여준 착한 노쇼와 울진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소식들이 은근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런 선한 마음들에 힘입어 울진에도 우크라이나에도 어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회복되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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