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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불싯 잡’ 탈출을 꿈꾼다

등록 2022-03-16 19:08수정 2022-03-17 02:31

[숨&결] 강도희·최연진 | 대학원 석·박사 과정(국문학)

퇴사하고 싶다. 2030 여성들 표심 분석이 한창인 와중에 뜬금없는 소리지만, 그 문제는 개표방송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머릿속도 새하얘져 버렸으므로 어쩔 수 없다. 한때 동지인 줄 알았던 민주당은 내내 내 또래 여성들을 무시하다 뒤늦게 어설프게 만회에 나섰고, 여성들은 그 위선에 질색하면서도 살기 위해 결집하여 표를 주었으나 그럼에도 결국은 졌다. 그 후 일주일여를 민들레 홀씨 불듯 여기저기 후원금을 보내며 지낸 지금, 나는 대선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머릿속이 멍할 때마다, 숨 쉬듯이 생각한다. 퇴사하고 싶다. 딱히 직장 환경이 열악하거나 월급이 박해서는 아니다. 나는 기업들의 신사업 전략 수립을 돕기 위한 보고서를 외주 받아 작성하는 일을 한다. 이른바 전략 컨설팅이라고 하면 듣기엔 좋지만, 사실 내가 하는 건 이미 고객사 ‘윗선’에서 하달한 내용에 영어자료 몇개 붙여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일에 가깝다. 경영진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려준다면야 그나마 낫겠지만, 불행히도 많은 경우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을 성심성의껏 뒷받침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 언뜻 봐도 쓸모없고, 직접 해보면 더욱 쓸모없는 일을 7년째 하다 보니 이젠 관두고 싶은 것을 넘어 매일 꼬박 여덟시간 이상을 이렇게 허비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진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렇게 “너무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을 ‘불싯 잡’(Bullshit Job)이라 부르는데, 컨설턴트는 책에서도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종사자나 기업 법무팀 소속 변호사 등과 함께 대표적인 불싯 잡으로 꼽힌다.

어떤 유익함도 만들지 않지만 높은 보수와 좋은 처우를 보장받는 이 불싯 잡들의 특징을 ‘지대 추구’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다. 동시에 흔히 고소득 사무직으로 분류되는 이 일자리들은 대입 등 각종 시험에 대한 보상의 성격도 가진다. 쉽게 말해 채용에서 학벌을 많이 따지고, 시험을 통해 자격요건을 입증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 모든 과정에 출신과 계급, 환경 같은 요인들이 깊이 개입한다. 사실 나 또한 이른바 명문대로 불리는 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어린 시절 해외 체류 경험이 있었던 덕에 어려움 없이 높은 어학 점수를 받아 지금의 일을 하게 됐다.

‘조국 사태’와 부동산에 의해 촉발된 공정 담론이 윤석열 대선 승리로 귀결된 지금, 이런 ‘고학력 화이트칼라’의 불평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건 실로 부적절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문대 입학, 대기업 취직, 부동산 매입의 공정한 기회를 요구하는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정말 이런 특권적 보상들뿐일까? 억대 연봉을 받으며 아파트 한채 마련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누리는 삶, 그것이 20대의 이상향이라고 하기엔 ‘탈조선’ ‘코인대박’ ‘파이어’(조기은퇴) 등 20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 ‘탈출’의 욕망에는 경제적 보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구가 엿보인다. 한정적인 특권을 둘러싸고 아귀다툼을 벌여야 하는 지금의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공정 담론의 형태로 나타난 청년들의 분노는 사실 현실의 어떤 지점에 대한 불만족, 불행에 대한 하나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미 이 담론에 편승해 표심을 얻으려는 시도가 대체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 지금 필요한 것은 그들이 원하는, 혹은 원한다고 간주하는 보상에 대한 허황한 약속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들의 삶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을 실마리로 더 나은 삶을 위한 의제들을 제시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부터 말하자면,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삶을 위해 다른 모든 ‘불싯’을 감수하는 일이 당연하다고 상정하는 사회는 정말이지 그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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