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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막내 방송작가로 산다는 것 (하) / 최유정

등록 2022-03-30 17:57수정 2022-03-31 02:30

내부 ‘증인’이 없으면 땡볕 아래든 빗속이든 무작정 길 위에서 방송국 빗장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 그게 방송작가여도 되는 걸까? 가까이서 본 사람이라면 방송작가가 방송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일은 주인처럼, 급여는 자원봉사처럼, 출입은 손님처럼. 기이한 구조다.

최유정 | 방송작가

방송국 하면 떠오르는 곳들이 있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다 저기로 출근하는구나. 그럼 저 안에 ○○방송팀도 있고, △△방송팀도 있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곳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1년 넘도록 당연하게 명찰을 걸고 스튜디오가 있는 ‘진짜’ 방송국으로 출근했다. 마지막 방송이 끝나고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방송을 찾다 공중파에서 방송하는 간판급 휴먼다큐 프로그램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꿈꿔왔던 방송이기에 그대로 직진했다. 며칠 후 방송국 근처 한 건물 안, ××프로덕션이라는 곳에서 면접을 보았다. 매일 아침 9시까지 그곳으로 출근하면 되고, 그 다큐는 총 4개의 외주제작사가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응? 이거 방송국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고? 외주제작사란 무슨 말인가? 본사로 출근하던 때에도 정규직은커녕 계약직도 되어본 적 없는 내게 외주제작사라니, 이건 하청의 하청 같은 느낌인가? 그럼 프리랜서인 나는 을도 아닌 병이나 정쯤 되려나.

방송사 피디 출신인 대표는 제작사다 보니 페이 조율이 어렵다며 내가 원래 받던 페이에서 무려 30만원가량 깎은 계약서를 내밀었다. 페이가 안 맞으면 같이 할 수 없다 하니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웃긴 건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퇴근 시간은 없고 식대는 물론 페이 협의도 안 되는 ‘상근 프리랜서’라는 구조였다. 대체 누가 만든 말인지 알게 되면 욕을 한번 해줘야겠다.

작가들이 하는 농담 중에 ‘노비도 대감집 노비가 낫다’는 말처럼 방송국 본사가 아닌 외주제작사 재직 시절엔 식대부터 사용하는 소모품 구입까지, 버는 것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무엇이든 필요하면 자비로 때우는 시스템. 소모품이야 나갈 때 갖고 나가면 되니 그렇다 치지만 방송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아르바이트 인건비까지 작가들의 지갑에서 나가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방송을 앞두고 우리는 외주제작사 소속이었기에 본사로 확인을 받으러 가야 했다. 매번 신분증을 입구에 맡기고 임시 출입증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당장 회의가 중요했고, 비정규직이라 원래 그런 거다 생각하며 그 과정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어느 날, 황당한 일이 생겼다.

방송국 건물도 아닌 주차장 입구 앞에서 도합 20년이 넘는 경력의 작가 세명이 출입증이 없다는 이유로 가로막혔다. 우리는 외주제작사 작가들로 본사 회의 때문에 왔고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받으려 한다고 말했으나, 경비 직원은 본사 정규직이 직접 출입구까지 내려와 우리의 신분을 입증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이 겹쳐 밥도 못 먹고 그 자리에서 한참 전화하다가 우연히 내부에서 나오던 다른 프로그램 동료 덕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다른 직원의 명찰을 빌려 멀리서부터 목에 걸고 사진은 한 손으로 가린 채 쿵쾅대는 가슴을 졸이며 주차장을 통과하곤 했다. 경비 직원은 명찰이 있기만 하면 따뜻한 인사를 건네줬다. 외주제작사 작가가 죄인인가, 아니면 비정규직이 죄인인 건가.

어려운 사람을 보듬는 방송을 만드는데, 정작 외주제작사의 작가인 나는 ‘진짜’ 방송국에 드나드는 일조차 어려웠다. 방송국에 갈 때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어야 했다. 끝내 나는 종이로 대충 만든 명찰을 걸고 진짜도 가짜도 아닌 신분으로 방송국에 출입했다. 외주제작사의 작가들은 엄연히 그 방송국에서 송출되는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이지만 명찰 한장 무게의 신분도 허락되지 않았다. 방송을 위해 수없이 지새웠던 밤과 하루에 100통 가까이 되는 통화 횟수는 방송국 이름이 적힌 명찰 앞에 까맣게 지워졌다. 법적인 보호와 정당한 페이는 이미 기대도 없었지만, 출입마저도 통제받는 건 희망의 끈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누구보다 방송을 위해 긴 시간 노동하는 사람이지만 자력으로는 방송국에 출입도 하지 못하는 사람, 내부 ‘증인’이 없으면 땡볕 아래든 빗속이든 무작정 길 위에서 방송국 빗장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 그게 방송작가여도 되는 걸까? 가까이서 본 사람이라면 방송작가가 방송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일은 주인처럼, 급여는 자원봉사처럼, 출입은 손님처럼. 기이한 구조다.

물론 아무나 들여보내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방송에 시간을 쏟음에도, 프리랜서라 주차장 문턱조차 넘기 힘든 삶은 싫다. 이름도 없이 출입 두 글자만 적힌 명찰이라도 다음엔 꼭 제대로 된 명찰을 걸고 방송을 만들고 싶다. 불청객처럼 눈치를 보며 방송국 문턱을 넘는 게 아니라 당당히 고개를 들고 일하는 그런 방송작가이고 싶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지난해 연 ‘11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응모작입니다. 다음주에는 다른 수기가 실립니다. <한겨레>는 해마다 수상작 등 응모작 일부를 게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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