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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이준석 대 공화국

등록 2022-03-31 13:25수정 2022-04-01 02:31

대한민국의 모든 비장애인들은 오랫동안 장애인의 희생에 ‘무임승차’해왔다. 그동안 대중교통을 포함한 국가 시스템이 사실상 장애인의 배제 혹은 제한적 이용을 전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팩트’ 하나를 공개한다. 놀랍게도, 장애인은 이동의 자유가 있는 헌법상 시민이다!
이준석(왼쪽) 국민의힘 대표와 김기현 원내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준석(왼쪽) 국민의힘 대표와 김기현 원내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박권일|사회비평가·<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매사 긍정과 낙관이 모토인 나는 드디어, 혐오 정치의 선두 주자 이준석에게서도 순기능을 발견하고 말았다. 이 정치인의 장점이 딱 하나 있다면, 한국의 첨예한 문제를 거의 다 건드린다는 점이다. 중요한 의제가 사건의 홍수에 떠내려가기 일쑤임을 감안하면 이는 사회적 논의의 역설적 기회일 수 있다.

서울교통공사 ‘장애인 대응 문건’은 이렇게 적었다. “장애인 단체의 시위는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는 ‘언더도그마’가 지배 논리로 자리 잡은 이슈다.” 이준석은 소셜 미디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장애인 혐오로 몰아도 무슨 장애인 혐오를 했는지 설명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모순이 제기되었을 때 언더도그마 담론으로 묻어버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말하는 ‘언더도그마’(underdogma)는 미국 극우단체 티파티에서 활동한 마이클 프렐이 만든 말로, ‘약자(underdog)는 선하고 강자(overdog)는 악하다’는 생각이 편견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약자성이 자체로 ‘선함’이나 ‘옳음’을 뜻하진 않는다. 그러나 약자를 돕는 일은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심지어 진화생물학으로도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 언더도그마를 말하는 이들은 단지 판단을 유보하는 데 머물지 않고 대부분 강자와 다수 입장을 옹호하고 약자를 공격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언더도그마’류 주장이 가장 환영받은 곳 중 하나가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였다. 여성, 호남사람, 이주민 등을 향한 갖가지 혐오표현들의 심층에 담겨 있는 정당화 논리는 능력주의다. “된장녀” “김치녀” 같은 유행어에는 ‘주제넘게 요구하는 탐욕스런 여자들’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자격과 능력도 없는 것들이 무임승차를 통해 과도하게 많은 자원을 가져가고 있다’는 소리다. 이런 논리 속에서는 약자·소수자의 구조적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교정하려는 실질적 기회균등 조치들이 ‘역차별’이고 ‘불공정’이 된다. 이들은 불공정에 분노하는 포즈를 취하지만 실은 사회 정의에 관심이 없다. 틈만 나면 “능력”과 “자질” 운운하며 할당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준석 본인이 정작 청년할당으로 공천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이들은 그저 제 편의대로 강자에 대한 우대, 약자에 대한 차별을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 그 능력주의의 끝, ‘막장’에 도사린 것이 장애인차별주의-비장애인중심주의(ableism)이다. 능력주의 신봉자에게 장애인이란 ‘무능력자의 원형’, ‘무임승차자의 전형’이다.

늘 같은 질문이 나온다. “장애인들은 왜 ‘시민’에게 불편을 주지?” 답도 늘 같다. “불편을 주지 않으면 해결은커녕 관심조차 없으니까.” 시위의 목적은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며,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시위는 ‘네모난 삼각형’ 같은 모순이다. 게다가 장애인의 지하철 승차는 엄연히 합법적인 행위다. 이준석과 서울교통공사는 장애인들이 ‘시민’을 볼모 잡아 시위를 벌인다고 공격하는데 볼모, 즉 인질은 강압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한 존재다. 회사에 못 간 것도 아니고 지각한 ‘시민’이 어떻게 인질씩이나 되나? 오히려 사태를 정확히 묘사하자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비장애인들은 오랫동안 장애인의 희생에 ‘무임승차’해왔다. 그동안 대중교통을 포함한 국가 시스템이 사실상 장애인의 배제 혹은 제한적 이용을 전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팩트’ 하나를 공개한다. 놀랍게도, 장애인은 이동의 자유가 있는 헌법상 시민이다! 국가는 시민 권리를 보장할 의무를 지니며, 못 할 경우 시민은 최대한의 수단을 동원해 요구하고 항의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왕국이 아니라 공화국을 만든 이유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시민에게 “불편하니까 여기서 시위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의미에서의 ‘혐오’다.

혐오가 한국사회를 뒤덮은 것 같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한쪽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준석과 서울교통공사의 공격이 시작되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후원금이 쇄도하고 있다. 김예지 국회의원은 전장연의 출근길 시위에 합류해 같은 당 대표의 망발을 사과했다. 저열한 선동에 휩쓸리지 않는 각성한 개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혐오에 맞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존재라는 사실이 결코 침해될 수 없는 격률임을 아는, 평범한 공화국 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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