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6·1 지방선거 기초의원 예비후보와 당원들이 3월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대선 공약이었던 ‘여성가족부 폐지’를 반대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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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권력 유지는 늘 여성과의 분리를 필요로 했다. 분리를 통해 배제를 만들고 남성 공동체는 곧 요새가 된다. 케이트 밀릿의 표현에 따르면 “남성의 무기고”이다. 이 공동체에서 남성의 동지애가 최고로 형성되는 분야가 바로 전쟁이다. 여성 배제를 통해 만들어진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부른다. 아내 구타가 오랜 세월 범죄가 아니었듯이, 성차별주의는 사회에서 폭력을 승인하는 문화적 장치다. 가부장제와 전쟁의 공통점은 모두 폭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국제정치를 분석하여 페미니스트 평화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베티 리어던의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는 바로 성차별주의와 전쟁 체제가 하나의 공통된 문제라는 것을 밝힌 저작이다. 성차별주의와 전쟁 체제는 둘 다 타자성을 폭력적으로 활용한다. 이 책은 1985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전쟁 체제란 무엇인가. 리어던은 ‘전쟁 체제’라는 용어를 “경쟁적인 사회질서”라고 정의한다. 이 질서는 사회의 전 영역과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경쟁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폭력에 대한 여성과 남성의 반응이 달라야 한다. 여성이 폭력에 두려움을 표출하는 것은 여성적이기에 허용된다. 하지만 남성은 폭력을 사용하는 기술과 역량을 계발하도록 길들여진다. 남성은 두려움의 대상을 공격하고 여성은 두려움의 대상에게 복종하는 구조다. 우리 의식에 깊숙하게 침투한 ‘성역할’의 개념은 이 전쟁 체제의 산물이며 동시에 전쟁 체제를 재생산하는 동력이다.
전시가 아닐 때에도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는 역할을 여학생에게 더 맡기듯이, 전쟁 체제는 ‘나라를 지키는 남성-이 남성을 위문하는 여성’이라는 구도를 꾸준히 시민들에게 학습시킨다. 이런 구도가 국가 질서 유지와 안보를 위해 바람직한 문화로 인식되도록 만든다. 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안보는 남성의 영역’이라 생각하게 된다.
일상에서 전쟁 체제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정치 사회다. ‘전쟁’은 나라를 지키는 힘을 드러내기 위하여 정치 영역에서 자주 소환하는 수사이다. “흉악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겠다”거나 “요즘 전쟁은 총이 아니라 반도체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듯이 세계를 항상 전시 체제로 인식시킨다. 은유로서의 전쟁은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공모가 만들어낸 위험한 수사학이다.
경쟁적이고 폭력적인 남성 중심 사회질서에 대한 숭배는 (남성) 권력자의 공격성을 지도력인 양 위장한 채 드러난다. 상징적인 예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 정상들과 악수를 할 때마다 힘을 과시하기 위해 상대방의 손을 꽉 쥔 일화는 유명하다. 트럼프는 예비후보 시절에도 자신보다 젊은 남성을 향해서는 “기력이 딸리는 젭(Jeb)”처럼 상대를 약해 보이게 만드는 수사를 적극 사용했다. 동물 행동학자인 프란스 더발은 트럼프의 이 행동을 두고 “예비 선거를 사실상 남성성이 과다하게 분출되는 몸짓 언어 경연장”으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지난 20여년간의 공포정치, 그리고 최근 실제 전쟁을 일으켜 세계적 지탄의 대상이 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치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역시 적극적으로 남성적 몸을 활용해왔다. 윗옷을 벗은 모습을 자주 노출하고 다양한 스포츠에서 유능함을 과시했다. 푸틴의 이런 행동은 ‘건강미’, ‘상남자’, ‘강한 스포츠맨’ 등으로 전달된다. 트럼프와 푸틴은 국제정치를 남성성 대결의 장으로 만들어 왔다.
국내 정치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지난 20대 대선에서 한국의 주요 남성 정치인들이 모두 과격한 몸짓은 물론이고, 이 몸짓을 도와주는 도구(야구 방망이, 권투 장갑, 격파용 송판)를 활용했다는 점은 상당히 문제적이다. 이때 도구는 곧 무기다. 무기는 남성 정체성의 주요 요소다. 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남성을 싸울 준비가 된 전사로 보이게 하는 중요한 표지로 작용한다. 사드 배치를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 효과를 가져온다. 실제로 배치를 하든 안 하든 사드 배치를 강하게 언급하는 행위만으로도 ‘무기고’를 가진 남성적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과학기술과 스포츠를 특히 여성의 진입이 어려운 장으로 만들어온 역사는 이처럼 기술의 남성화, 도구의 남근화와 관련 있다. 여성이 기술을 모르고 몸을 사용할 줄 모르는 취약한 존재로 남아야 ‘일상의 전쟁 체제’가 유지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 대상으로만 간주하면 그들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비용을 늘린다. 국가 안보, 곧 ‘국가’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할 때 윤석열 당선자는 “국가와 사회를 위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이 이 같은 일상의 전쟁 체제를 악용해 우리 사회의 성차별주의를 강화하려는 태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인지 예산을 줄이면 북핵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우선 ‘성인지 예산’을 여성가족부에 별도 배정된 예산인 양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것도 문제지만, 성인지 예산과 북핵을 연결시키는 이 의식의 흐름은 본질적으로 폭력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리어던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성차별이 심해졌던 시기가 경제·사회 분야의 예산을 군사 분야 예산으로 돌려버렸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여성의 정치 진입을 막으면서 여성들이 정책 결정에 개입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이 구조 속에서 군사적 지출이 늘어났으며, 이는 대부분 여성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군비 지출이 늘어날수록 빈곤의 여성화에 기여했다.
군사주의와 성차별주의 사이의 뿌리 깊은 역사성은 장애인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서도 나타난다. 강한 남성성 숭배는 성소수자를 배척하고, 전투적 역량을 인간의 사회적 가치로 삼기 때문에 장애인을 배척한다. 여성가족부 폐지는 여성을 비롯한 사회 소수자들의 의사소통 통로를 차단하는 상징적인 조치가 될 수 있다.
예술사회학자.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2020) <타락한 저항>(2019) 등의 저자.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평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비평의 가능성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