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국가안보와 평화 구축의 최후 보루다. 그렇게도 원치 않았던 이라크 파병을 최종 승인했던 노무현 대통령, 한-일 관계의 국내 정치적 민감성을 고민해야 했던 이명박 대통령, 남북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한-미 공조에 공을 들였던 문재인 대통령의 고뇌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아래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시험발사를 단행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지난달 25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문정인 | 세종연구소 이사장
한반도에 삼각파도가 몰아치고 있다. 북한이 2018년 이후 유지해온 모라토리엄을 깨고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필두로 공세 강도를 높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여전히 예측 불허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군사 위협을 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정학적·지경학적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신냉전 구도로 치닫는 미-중 관계도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5월10일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에는 이러한 삼각파도를 슬기롭게 관리하며 전쟁을 예방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구현해야 하는 고도의 복합 과제가 놓여 있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우선 공약에 대한 집착을 경계했으면 한다. 톰 폴리 전 미 하원의장은 선거 공약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선거 때 공약을 남발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가벼운 죄다. 그러나 그것을 무조건 실행하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대죄다.” 선거 과정에서 제시한 적잖은 공약은 집권 후 현실적 제약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타협과 합의를 특징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를 무시하고 모든 공약을 완수하겠노라고 집착한다면 부작용과 국론 분열을 피할 수 없다.
일반 공공정책과 달리 외교·안보정책은 상대가 있고 안과 밖으로부터 강력한 도전과 제약에 처하기 쉽다. 윤 당선자가 언급했던 대북 선제타격론이 대표적이다. 이를 중심에 두는 대북정책과 군사교리가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북측도 공세적인 전력 구조와 교리로 맞대응할 공산이 크다. 양측이 모두 대규모 선제타격과 확전 감수를 기반으로 유사시 대응 방향을 고착화한다면 한반도의 전략적 안정은 오히려 크게 훼손될 수 있다. 미국 등 주변국이 이 사안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드 추가 배치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전력에 요격 능력 강화로 대응하는 것은 일견 합리적이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다. 중국의 대응은 군사적 영역까지 미칠 수 있고, 상당한 수준의 경제 보복에 대한 대책 마련도 쉽지 않을 것이다. 2017년 사례가 보여주었듯 이 과정에서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소상공인들이나 일반 시민들의 반발도 작지 않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미·일 3국의 안보 협력 역시 양날의 검일 수 있다. 북측이 추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나 7차 핵실험을 감행할 경우, 동해와 서해 등 한반도 영역 내에서 3국 연합군사훈련이 공론화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일반 정서를 생각하면 이 역시 국내 정치적 휘발성이 높다. 2012년 지소미아 밀실 체결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윤석열 당선자가 국익과 실용주의를 강조한 것은 고무적이다. 외교·안보정책에 있어 이는 금과옥조와 다름없다. 국익이 한 국가의 목적지향성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실용주의는 현안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실용주의의 핵심은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하고 해법을 찾는 실사구시에 있다. 그러나 윤 당선자의 대선 기간 공약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예컨대 ‘북한의 선 비핵화’ 주장이 그렇다. 평양은 이미 핵시설, 핵물질,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을뿐더러 아이시비엠을 포함한 다양한 운반수단을 확보하고 있다. 제재와 압박에 근거한 ‘선 해체’ 전략만으로 평양이 이를 포기할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성이 없다. 이를 직시해가며 정교한 대안을 마련해나갈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이나 한반도 안보를 위해서도 미국과의 공조는 필수다. 그러나 두 나라의 국익이 모든 사안에서 완벽하게 일치할 수는 없다. 비록 철통같은 동맹이지만, 워싱턴의 정책이라고 해서 항상 옳을 리도 없다. 이를 충분한 고민 없이 수용하는 일이 반복되면 뜻하지 않은 후폭풍에 맞닥뜨릴 수 있다. 이전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무조건적 배척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믿는다고 해도, 그 원인을 세심하게 복기하고 교훈을 취사선택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와 평화 구축의 최후 보루다. 대통령직의 절대 명제는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국익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5천만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지는 최고지도자에게는 즉흥적 모험주의나 극단적 일방주의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도 원치 않았던 이라크 파병을 최종 승인했던 노무현 대통령, 한-일 관계의 국내 정치적 민감성을 고민해야 했던 이명박 대통령, 남북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한-미 공조에 공을 들였던 문재인 대통령의 고뇌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임자들이 떠안아야 했던 구조적 제약은 윤 당선자에게도 예외일 수 없음을 기억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