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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뉴노멀-혁신] 심층의 위기, 표층의 정치

등록 2022-04-10 18:04수정 2022-04-11 02:08

전날 피란민들이 몰린 기차역에 대한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52명이 숨진 우크라이나 동부 크라마토르스크에서 지난 9일 한 여성이 버스를 타고 떠나며 남편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크라마토르스크/AFP 연합뉴스
전날 피란민들이 몰린 기차역에 대한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52명이 숨진 우크라이나 동부 크라마토르스크에서 지난 9일 한 여성이 버스를 타고 떠나며 남편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크라마토르스크/AFP 연합뉴스

김진화 | 연쇄창업가

귀국길은 멀고 험했다. 원래도 14시간에 육박하는 보스턴~인천 직항편, 이번엔 무려 16시간 가까이 걸렸다. 러시아 영공 통과 금지. 전쟁의 영향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한국의 코로나 확산세는 우려를 갖게 했으나 막상 사람들을 만나보니 예전에 비해 한결 홀가분해진 인상이었다. 이제는 다들 한번쯤 걸리기 마련이고 내 차례가 된 것일 뿐이라는 체념. 나아가 겪고 나니 차라리 속시원하다는 반응까지. 진작 이랬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아졌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불과 일년 전까지만 해도 소속 집단의 첫 확진자로 낙인찍힐까 노심초사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정작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지난 몇년이었다. 아무런 성과 없이 ‘도로 미사일’로 귀결되긴 했지만 북-미 정상회담 이벤트가 있었다. 한편으론 미-중 갈등이 나날이 첨예화됐다. 그 와중에 전세계를 덮친 팬데믹은 일상생활은 물론 현대 보건의료 시스템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갔다. 공포에 질린 금융시장의 폭락, 뒤이어 막대하게 풀린 돈이 만든 자산가치 폭등의 롤러코스터.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전지구적 분업체계의 균열, 그리고 마침내 피어오른 전쟁의 포화. 어느샌가 ‘이 모든 것이 언제 끝날 수 있을까’, ‘언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같은 질문들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전망조차 불투명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벌인 전쟁은 지난 몇십년에 걸쳐 형성된 세계 질서를 뿌리째 뒤흔드는 양상이다. “우리가 알던 세계화는 끝났다”는 선언이 연달아 나오는 까닭이다. 지난 3월말 세계 최대 펀드운용사 블랙록 대표 래리 핑크와 오크트리 캐피털의 공동설립자 하워드 마크스가 하루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주서한을 통해 지난 30년간 지속된 세계화에 종언을 고했다. 이는 사실 브렉시트 이후 꾸준히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다만 그것이 코로나와 ‘지구적으로 연결된 전쟁’을 통해 성큼 현실로 다가온 것일 뿐이다.

크레디 스위스의 전략총괄 졸탄 포자르는 좀 더 구체적으로 국제 통화질서 재편을 전망한다. 그는 이번 위기가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금태환 중지 선언에 필적하는 사건이며, 브레턴우즈 3기 체제가 탄생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위기 이후 만들어질 글로벌 통화 시스템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지정학적 위상과 패권에 기반했던 브레턴우즈 2기 체제가 막을 내리고, 그에 따라 달러는 약세를 면치 못할 것이며, 자원과 상품 기반 통화 체제로 재구조화될 것이라는 과감한 전망. 위안화가 상대적으로 강세를 띨 것이라든지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자산이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관측에 동의하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 각자도생의 시대에 어떤 생존 전략을 취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역사를 장기적 구조, 중기적 국면, 단기적 사건이라는 세 층위로 분리해 역사학뿐만 아니라 세계 체제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브로델이 제시한 방식으로 보자면 지금 우리는 중기적 국면 전환 내지는 장기적 구조 변동까지 겪고 있는 중인가 싶다. 개인이나 개별 기업의 입장에서 보자면 매우 막막하고 불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지난 몇년간 우리 정치가 고작해야 ‘사건의 층위’, 그것도 표층에서만 저열하게 좌충우돌하며 갈등만 양산해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불안은 배가된다. 위기에 고스란히 노출된 시민의 삶을 지키기는커녕 자기들을 지켜달라는 정치, 못났지만 아직도 힘이 부족하니 더 밀어달라고 징징대는 정치를 그만 보고 싶은 이유다. 50여일 후면 또 선거다. 지구적 변동에 조응하는 가장 지역적인 해법들이 제시되고 충돌하는 선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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