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이길보라 | 영화감독·작가
‘차별금지법’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차별이 법으로 금지된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써본다. 차별금지법은 무엇이고 코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코다는 농인의 자녀를 뜻한다. 농인의 자녀 중 약 90%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인으로 태어난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의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험이 같지 않듯, 음성언어 중심 사회에서 농인과 청인의 경험은 다르다. 비장애인과 장애인, 농인과 청인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코다는 비장애인이자 청인이지만 장애인의 가족이자 농인의 자녀로서 차별을 경험한다. 그게 무엇인지 알기 전부터 부모를 보살피고 보호해야 하는 ‘영 케어러’(어린 보호자)가 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모든 일상이 아닌 고용, 교육, 재화 용역, 행정 서비스라는 공적 영역에 적용된다. 먼저 고용 영역을 살펴보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모집 채용을 하거나 근로계약을 할 때 성별과 장애, 나이나 인종,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 승진 배치, 직장 괴롭힘 등에도 해당된다. 이는 코다의 부모인 농인의 사회적 위치와 계층을 결정한다. 농인도 번듯한 직장에 다닐 수 있다는 말이다. 대기업에 갈 수도 있고 시민단체에서 일할 수도 있고 언론인이 될 수도 있다. ‘장애인은 ○○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사라지면 농인은 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다. 사회·경제적 위치가 달라진다. 농인의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에 갔을 때다. 자신을 교수라 소개하는 농인을 보고 문화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농인도 교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노점 장사를 하거나 공장에 다니거나 농사를 짓는 것 외에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농인과 코다의 정체성과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교육 영역에서 차별금지법은 농인과 코다가 처한 실질적 상황을 바꾸어낸다. 농인이 수어로 교육받고 이를 통해 한국어를 읽고 쓰는 법을 익힐 수 있다면, 농인은 각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한다. 예를 들면 이 칼럼도 농인이 쓰게 되는 것이다. 수어 기사와 수어 뉴스를 제공하는 웹사이트가 생기거나 수어 언론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또한 어느 교육기관에 가든 수어·문자 통역을 제공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의 일상적 차별이 사라진다. 친구들이 ‘(장)애자 새끼’ ‘병신’이라고 놀리거나 당사자를 괴롭힐 때, 그건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재화·용역 영역에서는 방송을 포함한 교통수단, 주거시설, 보건의료 서비스 등의 모든 분야에서 수어·문자 통역이 제공된다. 더 이상 텔레비전 옆에 앉아 들리지 않는 부모를 위해 뉴스의 내용을 수어로 통역하지 않아도 됨을 뜻한다. 음성언어 중심 사회에서 정보 접근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농인의 삶을 파격적으로 개선한다.
마지막으로 행정 서비스 영역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농인이 대통령, 국회의원, 시의원과 구의원 선거에 자신의 한표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한다. 각 후보가 어떤 공약을 내세우는지 수어 영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농인과 코다 정치인을 배출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또한 코다는 학교를 조퇴하고 통역을 위해 부모와 함께 관공서에 가지 않아도 된다. 재판이나 이혼과 같은 어렵고 민감한 통역을 맡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농인과 코다에 대한 차별은 일상적이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코다와 농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코다의 부정적 경험뿐 아니라 긍정적 경험도 말할 수 있게 한다. 농사회와 청사회를 오가는 코다의 다문화적 정체성을 기념하며 이중 언어 사용자로서 자긍심을 갖게 한다. 이런 멋진 세상, 차별금지법 제정이 만들 수 있다. 코다와 농인의 삶을 바꾸어낼 차별금지법, 당장 제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