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프랑스 뷜렌쉬르센에서 시민 한 명이 프랑스 대선 후보들 사진이 걸린 게시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AP 연합뉴스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4월10일(현지시각) 실시된 프랑스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 예상대로 에마뉘엘 마크롱 현 대통령과 극우파 마린 르펜 후보가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그러나 모든 게 예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급진좌파 장뤼크 멜랑숑 후보가 르펜과 1%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득표(21.95%)로 3위를 기록했다. 비록 결선에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6월에 실시될 총선에서 좌파가 재기할 발판을 마련한 것은 분명 성과라 하겠다. 그럼 멜랑숑 후보는 어떻게 신자유주의자 마크롱과 극우 포퓰리스트 르펜이 각축하는 틈바구니에서 이런 제3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가?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 상황과 그에 맞는 대안의 방향을 제대로 포착했다는 점이다. 멜랑숑은 2010년대 중반부터 생태사회주의를 제창해왔다. 불평등 위기, 전염병 위기, 기후 위기에 동시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금융 통제와 부의 재분배, 복지 확대, 공공 주도 에너지 전환을 제시했다. 무턱대고 핵발전을 지지하는 공산당 후보, 환경 의제는 중간계급 관심사라는 편견을 오히려 부추기는 녹색당 후보 사이에서 멜랑숑의 이런 지론이 빛을 발했다.
그런데 이에 덧붙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지점이 있다. 멜랑숑 후보는 선거 기간 내내 “제5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을 새 헌법으로 바꾸고 제6공화국을 열 제헌의회를 소집하겠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 공약에 공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흔히 이원집정부제의 대표 사례로 소개되는 현 프랑스 헌법은 실은 제왕적 대통령제, 아니 프랑스 맥락에서는 ‘제3제정’의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알제리 전쟁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샤를 드골이 급조한 이 헌법은 오늘날도 마크롱이 ‘노란 조끼 운동’ 같은 저항에 맞서 독단적 통치를 펼치도록 보장한다. 한데 만약 르펜 같은 이가 대통령이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멜랑숑은 2012년에 처음 대선에 나설 때부터 개헌을 통한 제6공화국 건설을 약속했다.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를 선호하며 의회 선거제도는 전면 비례대표제가 바람직함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새 공화국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시민 참여와 토론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래서 기존 의회와 별도로 제헌의회를 소집해 헌법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정치체제 변혁 비전에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기에 멜랑숑은 마크롱, 르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3강 구도를 만들 수 있었다.
돌아보면, 멜랑숑이 돋보이는 이 대목은 한국 진보정당 운동에 크게 부족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민주노동당 이후 진보정당들은 줄기차게 선거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선거제도를 아우르는 제6공화국 정치체제 전반에 관한 입장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1987년에 등장한 헌정 질서를 당연시했으며, 이것은 진보좌파가 범민주파의 종속적 일부로 여겨지게 된 유일한 원인은 아니어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대선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다당제 민주주의 강화’를 천명하고 지금도 정의당이 이를 강하게 주장하기는 한다. 그러나 현행 대통령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든가, 시민 참여를 중심으로 새 헌정을 수립하자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대선 중에 안철수 후보에게 ‘제3지대 연대’를 호소하던 모습뿐이다. 그 이유였던 ‘다당제 민주주의 강화’는 정작 제대로 부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양당 독점 정치가 말기로 치닫는 지금, 이런 상태가 더 지속되어선 안 된다. 제6공화국 정치체제를 대체할 비전은 무엇인가? 새 헌정 질서는 어떤 민주적 과정을 통해 수립되어야 하는가? 진보정당 운동은 하루빨리 이런 물음에 자신 있는 답을 마련해야 한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제6공화국의 구정치를 변혁해나가지 않는다면 사회변혁 역시 불가능함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