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김준 |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원 연수연구원
지난 20일, 미국 내 연구진을 중심으로 700개의 인간 유전체(게놈) 지도가 추가 작성될 것이라는 계획이 공식 발표됐다. 사람 수로 따지면 350명에 이르는 분량이다. 빈틈을 모두 채운 인간 유전체 지도를 담은 논문이 공식 발표된 시점으로부터 20일, 3조원가량의 막대한 연구비를 들여 단 하나의 유전체 지도를 작성한 시점으로부터 20여년 뒤 공식화된 계획이다. 그사이 유전체 연구 분야는 눈부실 만큼 빠르게 발전했고, 이제는 수천만원 정도면 혼자서도 고품질의 인간 유전체 지도를 작성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투입해야 하는 연구비는 10만분의 1 정도로 줄었으며, 필요한 시간과 인력도 그에 못지않게 줄어들었다. 유전체 지도 작성의 시대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유전체 지도는 수정란이 사람으로 자라는 과정에 필요한 정보를 일부 담고 있는 지도라고 볼 수 있다. 세포가 생물로 자라는 그 길 안내에 필요한 정보를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담아낸 것이다. 20여년 전 발표된 최초의 인간 유전체 지도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수 있는 길을 최초로 그려낸 것과 비슷하다. 다만 완벽하진 않아서, 지도 중간중간에 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다. 그래도 가다 보면 길이 이어지긴 하니 쓰기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가끔은 중요한 지역에 구멍이 뚫려 있어 길을 헤매기도 했다. 이번에 완성된 인간 유전체 지도는 이런 구멍을 모조리 메운 첫번째 지도다. 이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순간도 헤매지 않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부산 가는 길이 어디 하나뿐이던가?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정말이지 많다. 지도가 없으니 그 길이 어떻게 나 있는지 알 수가 없었을 뿐이다. 700개의 새로운 유전체 지도를 추가하는 일은 이런 온갖 길을 모조리 찾아내는 일에 가깝다. 서로 다른 사람의 유전체 지도는 적어도 한 지점에서는 서로 다른 길을 택해 갈라진다. 유전적으로 거리가 먼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길을 택하는 지점이 훨씬 많다. 유전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유전체 지도를 작성할 수 있다면 인류라는 집단이 담고 있는 거의 모든 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유전체 지도에서 서로 다른 길로 갈라질 때 이 서로 다른 길은 변이라고 불린다. 이런 변이 중 일부는 사람들이 어째서 서로 다르게 자라고 늙으며 병들어 가는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러니 가능한 다양한 유전체 지도를 작성해 그 안에 담긴 온갖 변이 정보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유전 질환의 원인이 되는 변이를 미리 알아둘 수 있다면 언젠가 그런 요인들을 해소해 유전 질환에서 더 자유로워지는 것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700여개의 인간 유전체 지도라면 그 원인을 훨씬 더 정밀하게 진단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물론 유전체 지도 작성만으로는 부족하다. 길을 안다고 해서 여행 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고 무슨 추억을 쌓게 될지 예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유전체 지도 정보를 안다 한들 살면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사고를 예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021년 등록장애인은 총 260만명, 이 중 심한 장애를 지닌 이들은 100만명에 이른다. 이 중 열에 셋은 사고로, 열에 대여섯은 질환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된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일단 이동부터 어렵기 때문이다. 지도 앱 속에서 안내되는 길이 있다 한들, 휠체어에 앉은 사람에겐 없는 길이나 다를 바 없을 수 있다. 휠체어로 갈 수 있는 길인 줄 알았건만 그렇지 못한 길에서는 사람이 죽기도 한다. 첫번째 인간 유전체 지도가 작성될 무렵 오이도역 리프트에서는 사람이 죽었다. 그로 인해 촉발된 이동권 투쟁은 인간 유전체 지도가 완성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활동을 지지한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장애인수용시설. 이 모든 게 폐지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 차별의 장벽이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