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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정인 칼럼] 우크라이나 사태와 동북아 핵 도미노

등록 2022-05-01 15:33수정 2022-05-02 02:39

핵무장은 한미동맹 혹은 경제적 번영과 양자택일의 관계다. 전자를 선택하는 순간 후자를 유지할 방법은 규범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난 2월27일 서구의 강력한 제재 조처에 불만을 터뜨리며 핵무기를 다루는 ‘억지력 부대’에 경계 태세 강화를 명령했다. 모스크바/AFP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난 2월27일 서구의 강력한 제재 조처에 불만을 터뜨리며 핵무기를 다루는 ‘억지력 부대’에 경계 태세 강화를 명령했다. 모스크바/AFP 연합뉴스

문정인 | 세종연구소 이사장

냉전 시기 인류는 핵전쟁의 공포에 떨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핵 억제 전략과 다양한 핵군축 협상을 통해 전략적 안정을 조성했다. 이른바 냉전의 역설이다. 그러나 장기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지난 70여년 지속된 ‘핵 터부’(핵 금기)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흔들기 시작했다. 특히 저위력 전술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가시화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우려와 논란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동북아 핵 도미노라는 나비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단초는 푸틴이 제공했다. 기존 국제 핵질서를 위협하며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공공연히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4일 만에 서방의 군사적 위협을 이유로 핵 경계태세를 취했는가 하면, 지난달 9일에는 공개석상에 ‘핵 가방’을 든 정부요원과 함께 등장하기도 했다. 푸틴을 포함한 러시아 지도부는 “국가 존립에 위협이 있으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신호를 반복해서 서방에 보내고 있다. 전세가 불리해지거나 서방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뉘앙스다. 빌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최근 한 강연에서 러시아가 전술핵무기 혹은 저위력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발언도 핵 도미노 현상에 힘을 싣는다. 2월19일 뮌헨 안보회의에 참석한 그는 ‘우크라이나가 옛 소련 시절 보유한 핵무기를 포기하면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던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서 한 약속을 서방(미국과 영국)이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자국의 안전을 위해 핵 보유를 강하게 희망한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흐름은 북한이 고수해온 핵무장의 정당성과 전술핵의 유용성에 힘을 싣고 만다. 그간 평양은 이라크 전쟁과 리비아 사태를 보며 핵무장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을 강화해왔다. 우크라이나의 오늘은 그러한 사고에 더할 것 없는 결정적 증거인 셈이다. “우리 핵무력의 기본사명은 전쟁을 억제함”에 있지만 “어떤 세력이든 우리 국가의 근본이익을 침탈하려 든다면 우리 핵무력은 둘째가는 사명을 결단코 결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김정은의 열병식 발언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러시아처럼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암시다. 게다가 북한 관영언론은 지난달 16일 신형 전술유도무기 시험발사 의의가 “전술핵 운용의 효과성과 화력임무 다각화 강화”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한반도 역내에서 전술핵을 실전 전력으로 활용하겠다는 핵 교리가 구체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루가 다르게 강화되는 북한의 핵전력과 교리는 국내의 핵무장 여론을 크게 자극하고 있다. 카네기재단과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의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 응답자의 71%가 북한뿐 아니라 중국의 위협 때문에라도 한국이 독자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겪은 일본도 지금은 반핵 정서가 크지만, 러시아와 중국, 북한에 이어 한국마저 핵무장에 나선다면 일본도 따라나설 것이다. 이 경우 대만의 핵무장도 피할 방법이 없다. 역내 모든 국가가 핵전력으로 서로를 위협하는 핵 도미노 현상은 우리에게 악몽으로 다가올 것이다.

워싱턴 논객 일부가 한국의 핵무기 보유에 우호적 태도를 보여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를 포함한 워싱턴 주류의 확고한 반대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다. 이들에게 한국의 핵무장과 한미동맹은 함께 갈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핵확산금지조약(NPT)으로 상징되는 국제 비확산 체제는 여전히 확고하다. 그 틀을 넘어서는 순간 또다른 북한으로 전락해 경제제재와 외교적 고립을 피할 길이 없다. 한마디로 핵무장은 한미동맹 혹은 경제적 번영과 양자택일의 관계다. 전자를 선택하는 순간 후자를 유지할 방법은 규범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핵 문제로 대표되는 핵확산과 러시아의 위협으로 상징되는 핵 사용 가능성의 증가가 모든 국가의 불안을 자극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의 국익은 여전히 동북아에서의 핵 도미노를 막고 전략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있다. 모든 국가가 경쟁적으로 핵무장에 나서는 상황을 저지하기 위한 예방외교가 오히려 한국의 정책적 지향점이어야 하는 이유다. 이는 또한 한국과 미국이 공유할 수 있는 동맹의 최우선 가치이기도 하다. 치솟는 핵확산 압력을 줄이기 위한 역내 다자협의체의 가동은 그 출발점일 것이다. 교착상태에 놓인 북핵 협상의 조속한 재개는 더욱 중요한 축이다. 세계 곳곳에서 핵무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는 지금,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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