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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면책되는 사법농단, 헌법의 실패

등록 2022-05-01 15:50수정 2022-05-02 02:40

[세상읽기] 류영재 | 대구지방법원 판사

4년차 새내기 판사였을 때 소소한 권리투쟁을 했다. 이른바 ‘주 2회 점심 따로 먹기 투쟁’. 투쟁이라고 하기엔 좀 비굴했는데, 당시 점심시간에 주 2회 운동을 하고 싶었던 나는 부장판사님께 찾아가 간절히 읍소했다. 판결을 잘 쓰기 위해서라도 체력 유지가 중요한데 밤엔 야근하기 때문에 점심시간 외엔 운동할 시간이 나질 않는다, 운동해서 질 높은 판결로 보답하겠다 등등. 부장님과 사이에선 원만히 합의되었는데 과하게 소문이 돌았나 보다. 졸지에 부장님께 ‘오늘부터 점심 따로 먹겠다!’고 뜬금포 일방적 선언을 한 판사로 찍혔다. ‘사법부의 녹두장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때 소문을 들은 친한 선배 판사님께서 조언을 건넸다. “류 판사님, 점심을 따로 먹는 게 문제는 아닌데 혹시나 그런 일로 재판부 내에서 지나치게 갈등이 커진다면 적절히 조정하세요. 판사한테 점심을 어떻게 먹는지가 크게 중요하진 않잖아요. 그거 양보해도 돼요. 대신에 재판에 대해 이견이 생길 때, 그땐 판사님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토론하고 또 토론하세요. 재판만큼은 양보하지 마세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건 재판이잖아요.” 사실 내겐 점심도 큰 문제였지만, 매료되었다. 지금도 그 조언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건 재판이라고.

그래서 충격이 컸다. 내가 믿었던 사법부가, 다른 건 몰라도 재판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판사들이 재판에 개입하거나 재판을 다른 국가기관과의 협상 대상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에. 많은 판사들도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중지를 모았다. 그렇게 시작된 소위 ‘사법농단’ 재판 중 ‘수석부장판사의 소속 법원 판사들에 대한 재판 개입’ 사건 재판이 대법원에서 무죄로 최종 확정되었다.

“법관 독립을 침해한 위헌 또는 부적절한 재판 관여에 해당한다. 그러나 판사에게는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할 권한 자체가 없다. 수석부장판사의 재판 개입은 월권이지 권한남용이 아니어서 직권남용죄 무죄.”

대법원은 원래부터 직권남용죄를 좁게 해석했다. 공무원이 직무상 권한 없는 일을 직위를 이용하여 현실화시켰을 경우에는 월권이라는 이유로 직권남용죄의 성립을 부정했다. 비유하자면, 상사가 부하에게 직위를 이용하여 논문을 대신 쓰라고 시키면 상사에게 논문 대리 작성을 명할 권한이 없으므로 죄가 되지 않는단 얘기다. 이번 수석부장판사의 재판 개입에 대한 재판에도 그 해석이 유지되었다. 이러한 대법원의 무죄판결은 공무원의 직무 관련 범죄에 존재하는 큰 공백을 여실히 보여준다.

재판 개입은 헌법상 보장된 재판 독립 침해이므로 위헌이다. 참고로 독일의 연방일반최고법원도 사법행정권자가 개별 사건의 재판 업무(판결, 결정, 명령, 심증 개시, 판결문의 표현 방식과 내용 등)에 관하여 직간접적 지시를 하거나 특정한 방향이나 방법으로 직무를 처리하도록 요구·요청·권고하는 것은 재판의 독립을 침해한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판사의 재판 개입에 대해 어떤 책임을 물었는가. 판사의 직무상 위헌 행위에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법관 탄핵, 법관 징계, 형사처벌, 행정처분 등의 절차가 있다. 해당 사건의 경우, 법관 징계는 경징계로 끝났다. 탄핵은 국회가 해당 판사가 퇴직하기 직전에야 탄핵소추해 헌법재판소가 각하했다. 형사처벌은 대법원이 직권남용에 직위를 이용한 월권적 행위를 포함하지 않음으로써 불가능해졌다. 수석부장판사는 소속 법원 판사들의 재판에 적어도 세차례 개입했고 그 재판들은 모두 그 개입에 의해 변경됐지만, 우리 사회는 수석부장판사에게 경징계 외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못한 셈이다.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인 사법농단 사건들도 대부분 법관의 권한을 벗어난 일들이다. 판사에게는 재판에 대해 청와대와 협상할 권한이 없고, 청와대나 국회에 재판 관련 편의를 제공할 권한이 없으며, 다른 판사들의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 권한이 없으니까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런데도 강행해서 위헌적 문제가 발생한 것이 사법농단인데, 우리 사회가 사법농단을 일으킨 자들에게 어떠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법농단이 밝혀졌을 때 이보다 더한 헌법적 위기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사법농단 관여자들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 상황 자체가 거대한 헌법의 실패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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