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서한나 | 보슈(BOSHU) 공동대표·<사랑의 은어> 저자
이런 친구가 하나 있다. 내가 통 넓은 바지를 찾고 있으면 어느새 먼저 입고 나타나고, 내가 알 작은 안경을 장바구니에 넣어둔 날이면 그 멋진 안경을 쓰고 나타나는 그런 친구다. 나는 기회 될 때마다 그의 차에 있는 영수증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이번에는 그가 입고 온 트레이닝바지가 궁금했다.
영수증에서는 그의 생활이 보였다. 전기차를 몰면 공영주차장 주차비가 반액이며, 유기농산물을 다루는 생활협동조합인 한살림에서 섞박지와 채소만두를 판다는 사실을 알았다. 숙취에 시달리던 오후, 우연히 들어간 한살림에서 헛개즙 한팩에 갈증을 쫓았던 날부터 나는 한살림에 은근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너 한살림 좋아하냐?’는 물음에 그는 한보 앞선 답을 내놨다. “전국에 있는 한살림 지점 하나씩 가 보는 게 꿈이야.”
친환경을 강조하는 양순한 가게에는 더 나이가 들면 다니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유행보다 멋과 가까운 친구의 입에서 한살림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적잖이 신선했지만, 한편 생태와 순환이 시의적절한 테마라는 것을 느끼는 중이기도 했다. 우리는 화제로 삼아본 적 없던 생협 이야기를 하며 달렸다. 너 거기서 파는 김 알아? 너 식혜 먹어봤어? 집요하게 묻는 데 재미가 붙은 거였다.
지역에서 생산한 식재료를 지역에서 소비하는 일과 급식에 지역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에 관해서는 옥천을 돌아다니던 날 들어보았다. 묵무침으로 점심을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지역특산물판매장을 구경하며 좋아했을 뿐, 내 삶에 섞지는 않았다. 냉장고에는 코스트코에서 사 온 소스와 냉동식품이 있다. 먹지 않는 음식이 짐처럼 느껴진다는 걸 알면서 큰 마트에 가고,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꺼림칙하게 여기면서도 공복에 고기를 찾았다.
“마트 가면 사시사철 비슷한 공산품뿐인데, 생협에는 로컬 식재료가 보이잖아. 매대 보면 계절이 순환하는 게 보여. 거기 청국장도 맛있다.” 파와 양파를 볶다가 물을 조금 붓고 청국장을 넣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생협 대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
우리는 손두부를 만드는 청국장집에서 두부와 나물을 집어 먹으며 칭송을 이어갔다. “거기 와인 팔거든. 그것도 맛있어. 단 거 있고 안 단 거 있거든. 둘 다 맛있어.” 오늘 술을 마신다면 집에 와인냉장고가 있는 사람보다 생협에서 와인 한병씩 사다 마시는 사람과 있고 싶다. 와인에 치즈라는 공식을 깨고 자색고구마칩에 와인을 먹을 수도 있다. 군더더기가 없어 가뿐한 생활일 테다. 해장은 팩에 든 식혜로 하면 좋을 것이다.
하얗게 무친 도라지에서 단맛이 돌았다. “똑같은 양념인데 다른 맛이 나지.” 그는 애호박과 도라지를 번갈아 먹었다. “참기름에 소금 간만 한 건데도 재료가 다르니까.” 그는 도라지를 다 집어 먹고 남은 기름에 두부를 찍어서 남김없이 먹었다.
그는 얼마 전 당근마켓에서 이만원 주고 산 무화과나무 줄기가 굵어졌다며, 가을에 열매 열리거든 따 먹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분이 아기 때부터 키운 거래. 무화과나무 보고 싶다.” 다용도일 열매를 상상하며 나도 당근마켓에 무화과나무를 검색했다. 식물 파는 사람들의 소개말에는 진지한 애정이 엿보였다. 글을 계속 읽고 싶은 마음에 집에서 기를 만한 다른 식물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애플민트를 2000원에 내놓은 판매자는 어린 식물을 이렇게 설명했다. “작아요. 해 보여주면 혼자 잘 자라요.”
친구가 애플민트 나눠줄 테니 사지 말고 기다리라 했다. “사람이 바뀌는 것도 의식주 순서 따라가는 거 알지.” 피 묻은 음식을 먹지 않는 친구 앞에서 낮술 장소로 횟집을 떠올렸음을 반성했다. 그와 헤어지고 트레이닝바지를 주문했다. ‘의’에 이어 ‘식’에서도 바뀌고 있는 나를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