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프리즘] 이정연 | 젠더팀장
지난 28일 오전 9시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날 오후 ‘여성가족부 내부 성폭력 사건 은폐 의혹’에 관한 기자회견이라는 안내까지 나온 터였다. 다른 부처도 아니고 ‘여성가족부’의 성폭력 은폐 의혹이라니. 주제와 상황, 기사화하기에 모두 충분해 보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기자회견 예고가 나오자마자 여가부에 따로 문의했지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답만 돌아왔다. 긴장 속에서 28일 오전 기자회견을 기다렸다.
하태경 의원실은 기자회견과 함께 관련 보도자료를 국회 출입기자 등에게 발송했다. ‘여가부 내부 성희롱 사건이 있었는데, 가해자는 승진하고 피해자는 퇴사했다’는 내용이었다. 하 의원은 가해자가 성폭력 예방 캠페인 영상에 출연해 ‘2차 가해’를 했다는 문제도 제기했다. 발표한 내용만 놓고 보면 여가부의 조치에 문제가 분명히 있었다. 곧장 기자회견 내용이 기사화되기 시작했다.
<한겨레>도 보도자료와 기자회견 내용을 바탕으로 재빨리 기사를 작성했다. ‘이야기가 된다’는 판단이 서면 빠르게 기사를 써서 올려야 디지털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으니. 하지만 고심 끝에 이 사안은 기사화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뉴스아카이브 ‘빅카인즈’에서 ‘하태경, 여성가족부, 성희롱’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9개의 기사가 뜬다. 대부분 하태경 의원이 제기한 의혹과 여가부의 입장, 설명자료를 갈무리해 작성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9개 기사 가운데 단 하나도 ‘그것’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여기서 말한 ‘그것’은 ‘피해자의 뜻’이다. 성희롱·성폭력 사건의 공론화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피해자의 뜻이다. 공론화는 그 어떤 것에 앞서 ‘피해자 일상회복’과 연결지어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해를 보았다고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은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하면 공론화하고, 그렇지 않겠다 여기면 비공개로 사건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피해자 관점의 사건 처리이며 원칙이다.
이 사안을 취재한 젠더팀 기자가 하태경 의원실에 따로 문의했다. 의원실은 “피해자와 따로 접촉하지 않고 발표했다”고 했다.
성폭력 피해 상담 단체에 이런 상황을 설명했다. “기사화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피해자 의사가 확인이 안 됐다는 점에서 말이다.”(한국성폭력상담소) “피해자 인권이 가장 우선시돼야 하는데, 다른 목적으로 피해자의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한국여성민우회) 이미 써놓은 기사까지 있었지만, <한겨레>는 기사를 내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태경 의원실은 피해자 동의를 얻지 않은 채 여는 기자회견임을 밝히지 않았다. 9개 언론사는 그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기사에서는 그와 관련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피해자 지원 단체들은 하 의원이 제기한 ‘여가부 성폭력 사건 은폐 의혹’에 담긴 맥락과 의도를 지적했다. 여가부를 “반헌법적인 기관”이라고까지 일컬으며 폐지를 외쳐온 하 의원이 ‘여가부 때리기’를 위해 이 사건을 이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그가 때린 것은 결과적으로 여가부만이 아닐지 모른다. 어디에선가 조용히 일상회복을 해나가고 있을 피해자를 다시 아프게 했을지 모른다.
“통상 피해자의 요청에 따라 조사를 중지하려면 기록물이나 녹취 등 명시적인 동의서를 남겨야 하는데, 성폭력 예방 전담 중앙부처인 여성가족부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공식 절차를 ‘패싱’한 것이다.”
하태경 의원실이 보낸 보도자료 내용 일부다. 여가부는 피해자와의 문답 등을 통해 조사중지 의사를 7차례 확인했다고 해명했다. 하 의원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피해자 뜻을 ‘패싱’한 채 세상을 향해 떠드는 그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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