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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리 활동은 해피엔딩일 거야

등록 2022-05-02 16:01수정 2022-05-03 02:42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영외, 근무시간 외 동성 군인간 성관계 처벌에 관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하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영외, 근무시간 외 동성 군인간 성관계 처벌에 관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하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숨&결] 방혜린 |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2017년 군인권센터에 합류하며 군인권 활동에 발을 딛게 됐다. 해병대에서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첫 출근 날 책상에 앉자마자 마주한 것은 화이트보드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누군가의 이름들과 날짜였다. 업무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이들의 상담 내용을 모두 살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관계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23명의 군인이 입건돼, 12개 사건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으며, 비로소 지난달 한 사건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된 ‘육군 성소수자 군인 색출사건’이다.

군인권센터에서 활동하며 퇴사하기 전 꼭 마침표를 찍었으면 했던 사건이 이 ‘육군 성소수자 군인 색출사건’과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이었다. 두 사건 모두 피해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주변 눈총을 받아야 했고, 관련 내용이 주변에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해야 했고, 피해자임에도 부당한 공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내년엔 해결될 거예요’라고 했던 사건은 질질 끌었고, 기약 없는 미래가 돼가자 불안 속에 전역을 준비하는 이도 나타났다. 하지만 긴 시간 이 악물고 버티며 장기복무에 선발되고, 진급하는 경우도 생겼다.

2017년에 시작된 두 사건은 2022년 어떤 식으로는 마침표를 찍었다. 3월 대법원의 선고가 있었던 해군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은 2차 가해자 함장은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됐지만, 정작 1차 가해자인 부서장에게는 무죄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같은 함정에서, 같은 피해자를 상대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가해자들이 서로 다른 재판부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사건이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판단되지 않은 탓이다. 무죄가 확정된 1차 가해자는 복직해 밀린 월급까지 받았고, 피해자는 “후배들은 저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기를, 혹시 피해를 보았더라도 꼭 생존자로 살아남기를, 기다림의 시간이 이처럼 길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서로 동의하에 이뤄진 항문성교(계간)도 2년 이하 징역으로 처벌하는 군형법(92조의6) 조항에 근거한 ‘성소수자 군인 색출사건’ 대법원 판결문을 읽었을 때, 이토록 진보적이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대법원은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성적 지향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간의 성적 자유를 확장해온 역사적 발전과 특정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이나 처벌을 금지하고 있는 세계적 추세에 비추어 보면, 현행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 헌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고 이 조항의 위헌성을 강조했다. 대법원의 이런 판단은, 헌법재판소가 심리 중인 12개 사건 결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성소수자에 대한 군대 내 인식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한다.

그토록 빨리 결론 나길 바랐던 두 사건이, 2022년 퇴사를 앞두고서야 엇갈린 결말을 맞게 되자 씁쓸함이 남는다. 다만 한편으로는 어떤 방식이 됐던 간에 한 장(스테이지)을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한숨 돌리게 된 측면도 있다. 어쩌면 인권 활동이라는 건 난도 높은 ‘슈퍼마리오’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빨리 이 ‘던전’을 탈출해서 ‘쿠파’를 쓰러뜨린 다음 ‘피치’ 공주님을 구해야 하는 ‘슈퍼마리오’의 마음가짐으로 전진하지만, 함정에 빠지거나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 게임이 계속 리셋되는 것과 같달까. 한 스테이지를 끝내고 나면 더 강력하고 어려운 다음 스테이지가 기다리고 있는 점도 그렇다.

성소수자 군인 색출사건은 이제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을, 해군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은 2차 가해자 파기환송 판결과 복직한 1차 가해자에 대한 대응이라는 다음 스테이지를 남겨두고 있다. 다음 스테이지를 앞두고 나만 ‘퇴사’라는 게임오버를 선언한 것 아닐까, 마음에 걸린다. 부디 다들 지치더라도, 이 게임은 끝을 볼 테고, 약속된 해피엔딩이 기다리리라는 것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반드시 이 게임에서 이길 것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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