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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준석 대표, 터널 속으로

등록 2022-05-04 18:03수정 2022-05-06 15:38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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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여기 어디에 집이 있다는 거지?’ 내비게이션에서 주소 검색이 안 돼 물어물어 찾아간 곳에 있는 건 집이 아니라 비닐포대 더미 같은 기이한 구조물이었다. 잘못 찾아왔나 싶어 다시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여쭤보니 그곳이 맞는단다.

할아버지의 집은 굴속이었다. 굴속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굴속이다. 몸을 90도로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다. 입구에는 대각선으로 마주 보며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나무 몸통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삼각형 안으로 몸을 숙이며 들어가야 했다. 그런 터널을 몇번 넘어가야 마당이 나왔다. ‘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어 놨지?’ 그런 의문을 갖고 20여m쯤 되는 터널을 지나 할아버지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 같았다. 허리가 90도로 굽어 있었다! 허리가 꼿꼿한 나에게는 허리를 숙여서 지나가야 하는 불편한 터널이지만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에게 그 길은 뻥 뚫린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였다. 왕진을 끝내고 나올 때도 허리 숙여 나가느라 우리는 느릿느릿 따라갔지만 앞장섰던 할아버지는 이미 쏜살같이 빠져나가고 없었다.

할아버지의 집은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할아버지의 몸에 맞춘 세계였다. 왕진 온 나에겐 너무 낮아서 허리를 숙여야 했던 방 천장도 키 작은 할아버지에겐 한없이 높았다. 그 집에서 할아버지는 비장애인처럼 편하게 돌아다녔고 나는 장애인처럼 불편하게 이동했다. 그 터널 속 세계에서 나는 이동약자였다. 그 불편함 덕분에 나는 다시 터널 밖으로, 비장애인의 세상으로 나와서 내가 한번도 장애인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 그뿐일까. 한번도 여성이었던 적이 없는 남성, 한번도 환자였던 적이 없는 의사, 한번도 소수자였던 적이 없는 다수자…. 내 삶에는 너무나 많은 ‘한번도’가 있었다. 그 ‘한번도’ 때문에 세상은 이렇게 쩍쩍 금이 가 있는 거였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을 마주하며 나는 다시 그 터널을 본다. 아침 출근시간. 내가 그렇게 쉽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장애인들이 같은 시간대 출근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21년간의 이동권 투쟁 속에서도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의 편의성을 위해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할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오면 몸을 의지했던 유아차를 들고 시골 버스에 타는 게 불가능하듯이, 장애인의 불편함은 비장애인의 세상에서 새롭게 발생했다.

터널을 지나듯 시간이 지나면 나는 결국 할아버지의 세계를 마주할 것이다. 나는 결국 장애인으로 죽는다. 다들 노환으로 죽기를 바란다지만 그 말의 실상은 결국 걷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씻지 못하고 먹지 못하다 결국 숨 쉬지 못해 죽는 것이다. 아무도 피해 가지 못한다. 운이 좋으면 몇달이지만 대부분은 몇년씩 그런 상태로 있다가 죽는다.

전철을 지연시키는 장애인들에게 민폐를 끼친다며 댓글을 다는 사람에게도 결국, 자식이든 이웃이든 사회든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며 자신의 삶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온다. 출근길 지하철을 기어이 타려는 장애인의 얼굴에서 나는 내 미래의 얼굴을 본다. 그러니 장애인들의 싸움은 나의 미래를 위한 싸움이다. 장애인들은 지금 자신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싸우고 있다. 유아차를 밀며 횡단보도를 엉금엉금 건너는 노인들에게 빨리 지나가라며 빵빵 경적을 울려대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뀐다면 바로 그 싸움 덕분이다.

장애인들의 투쟁을 비난하는 정치가 옹호하는 것은 출근하는 비장애인들의 입장이 아니다. 어차피 사람들은 입장 바꿔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이다. 그 터널을 지나면 뒤집힌 세상이 나를 맞이했다. 느렸던 사람은 빨라지고 빨랐던 사람은 아주 느려졌다. 처음이었던 사람이 나중이 되고 나중이었던 사람이 처음이 되었다. 지상에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문이 있다면 아마 그 터널일 것이다. 뒤바뀐 처지가 우리를 연결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아픈 노년이라는 기나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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