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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보리공주 이야기

등록 2022-05-09 17:58수정 2022-05-10 02:06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편집국에서] 김경욱 | 스페셜콘텐츠부장

‘보리공주’는 1968년 5월에 태어났다. 경남의 한 시골마을에서였다. 가수 신해철, 윤상이 같은 달 태어났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그해 태어났다. 김신조 등 북한 124부대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다가 대부분 사살된 것도, 이에 보복하기 위해 684부대(실미도 부대)가 창설된 것도 모두 그해 일어난 일이었다.

보리공주는 또래보다 키가 컸고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배구를 시작했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공과 함께 솟구쳐오를 때, 그는 세상의 꼭대기에 있었다. 운동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이 어린 시절 그의 감각에 깊게 새겨졌다.

배구 명문인 마산제일여고에 진학했다. 실업팀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공격수였다. 1987년 1월13일치 <동아일보>에는 당시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작년 4위 팀인 호남정유는 중앙공격수 안은주(마산제일여고)가 가세, 전력에 큰 보탬이 돼 1차 대회부터 현대와 미도파를 괴롭힐 팀으로 꼽히고 있다.” ‘여자배구에 신인 기수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담긴 내용이다. 현대와 미도파는 각각 전년도 대회 1, 2위 팀이었다. 호남정유는 지금의 지에스(GS)칼텍스다.

‘보리공주’는 당시 팀 언니들이 안은주에게 붙여준 애칭이었다. ‘경상도 보리문디’에서 따왔다. 안은주는 이 별명을 아꼈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 경남 밀양에 둥지를 틀었다. 초·중학교, 실업팀, 생활체육팀 등에서 코치를 하며 후배들을 가르쳤고, 남편과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얻었다. ‘은주’(은구슬)란 이름처럼 빛나는 삶이었다.

하지만 그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1년 그는 ‘원인 미상 폐질환’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의사는 말했다. 43살이던 그때, 전국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환 환자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해 8월 정부의 역학조사 발표로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는 쓰러지기 3년 전부터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을 사용해왔다.

가습기살균제가 망가뜨린 것은 그의 폐뿐만이 아니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병원비에 가정은 뿌리째 흔들렸다. 그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앞으로 쓴 편지에서 “저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버렸습니다. 왜 저는 우리나라에서 판 제품을 사 쓰고 아이에게 빚만 남겨야 합니까”라고 비통해했다. 그는 정부의 긴급지원대상에 선정돼 간병비 일부 등을 지원받았지만, 그의 가족들은 병원비로 5억원이 넘는 빚을 졌다.

보리공주는 2015년과 2019년 두번 폐 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 뒤 합병증으로 신장이 망가졌고, 피부색이 검게 변했다.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욕창에 시달렸다. 시력과 청력을 잃어갔다. 2019년 목을 절개해 산소발생기를 달면서부터는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사그라지는 몸으로 병상에 누워, 그는 썼다. “옥시는 배상하라.”

그러나 그 외침은 끝내 무위로 돌아갔다. 지난 3일 0시40분, 그는 숨을 거뒀다. 54살, 투병생활 12년째였다. 그는 옥시 쪽으로부터 직접적인 사과와 배·보상을 받지 못했다. 지난달 ‘피해자 7천여명에게 가해기업 9곳이 최대 9240억원을 지급하라’는 조정안이 마련됐지만, 보상액의 60%가량을 부담해야 할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산업은 이를 거부하고 나섰다. 피해보상금 분담 비율이 과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인체에 안전하다고 광고하며 제품을 팔고 유통한 기업이 문제 해결에 손을 놓으면서,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나는 피해자는 하루하루 늘고 있다. 갓 태어난 아기부터 전직 운동선수에 이르기까지 ‘기업 살인’의 피해자는 광범위하고 전방위적이다. 안은주는 가습기살균제로 숨을 거둔 1774번째(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가습기살균제피해지원센터 집계 기준) 피해자다.

지난 5일 경남 함안 한 추모공원에서 보리공주는 영면에 들었다. 그는 그렇게 고통의 멍에를 벗었다. 인간세계의 야만성은 끝이 없다는 것을, 그는 죽음으로 몸소 보여줬다. 5월은 그가 세상에 온 달이자 세상을 떠난 달이다. 지금, 청보리는 지천으로 푸르다.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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