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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환경

배구선수 죽인 ‘그 살균제’…옥시는 보라, 말 못해서 쓴 “아파”

등록 2022-05-03 14:26수정 2022-05-03 20:52

가습기살균제 피해 안은주씨 별세…향년 54
옥시, 전날도 국회서 책임 회피…사과 끝내 없어
2019년 12월 안은주씨가 두 번째 폐 이식 수술을 마치고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손으로 쓴 글씨.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2019년 12월 안은주씨가 두 번째 폐 이식 수술을 마치고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손으로 쓴 글씨.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피해보상금) 조정의 합리성이 떨어져서…”

“지금 저희가 재판을 진행 중인 상황이라서… (답을 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열린 한화진 환경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는 이례적으로 옥시레킷벤키저의 박동석 대표와 애경산업의 채동석 대표가 증인으로 나왔다. 두 기업이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가 제시한 조정안을 거부한 데 따른 것이다. 여야 의원들은 두 대표에게 ‘조정안을 수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었고, 두 대표는 시종일관 재판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해 의원들의 질타를 받았다.

‘아파’라고 쓴 두 글자

같은 시각 전직 배구선수 안은주(54)씨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두 번이나 폐 이식 수술을 받은 터였다. 수술 뒤 합병증으로 목을 절개해 산소발생기를 찼다.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펜으로 글을 써서 가족과 대화를 나눴다. 2019년 두 번째 폐 이식 수술을 마치고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그가 쓴 손글씨는 “아파”였다.

안은주씨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5년 9월 서울 여의도 옥시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안은주씨.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안은주씨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5년 9월 서울 여의도 옥시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안은주씨.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안씨는 배구선수였다. 호남정유 실업팀에서 코트를 누볐다. 선수에서 은퇴한 뒤 경남 밀양의 초등학교와 실업팀에서 코치와 배구 심판 등을 지냈다. 남편, 아들, 딸과 가정을 꾸렸다. 행복한 날들이 평생 이어질 것 같았다.

삶이 뒤흔들린 것은 2011년의 일이다. 그해 안씨는 갑자기 쓰러졌다. 부산 동아대병원은 ‘원인 미상 폐질환’ 판정을 내렸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원인 미상’ 판정을 받던 때였다. 폐에 뿌리 박힌 독은 온몸으로 퍼졌다. 신장 기능 이상으로 인한 투석, 하반신 마비와 욕창, 시력 및 청력 저하…. 병원비로 친정집은 5억원을 빚졌다. 쓰러지기 전 그는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으로 가습기를 청소했다.

안씨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이젠 전 스스로 포기하려고 합니다. 똑같은 옥시 제품을 쓰고도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 이유에 대한 어떤 이유와 설명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듬해부터 그는 병원 침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의 긴급지원대상으로 선정됐지만, 옥시쪽으로부터는 보상을 받지 못했다.

옥시∙애경 “피해보상 분담금 합리적이지 않다”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는 지난달 피해자 7천여명에게 최대 9240억원을 지급하라는 조정안을 내놨다. 11년 동안 이어진 가습기살균제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듯 했다. 그러나 옥시와 애경 쪽이 조정안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사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두 기업은 △피해보상금의 60% 정도를 부담하는 점 △조정이 이뤄지면 앞으로 기업에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조항이 조정안이 아니라 권고안에 담긴 점 등을 문제 삼았다.

3일 새벽, 신촌세브란스병원을 떠나는 고 안은주씨. 2018년 12월 두 번째 폐 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한 뒤 싸늘한 주검으로 병원을 나섰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3일 새벽, 신촌세브란스병원을 떠나는 고 안은주씨. 2018년 12월 두 번째 폐 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한 뒤 싸늘한 주검으로 병원을 나섰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2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박동석 옥시레킷벤키저 대표는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조정 작업을 두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면서도, ‘조정안이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전제 조건을 달았다. 자사 비용 부담을 최소화하고, 앞으로 피해자와의 조정 작업에 기업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취지다.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인 박대출 국민의힘 의원은 청문회 말미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두 분(박동석, 채동석 대표)의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고 말했다. 환경노동위는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논의하는 별도의 청문회를 여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안은주씨는 산소통을 매달고 밀양에서 서울 병원까지 오갈 정도로 굉장히 강인한 분이셨다. 최근 3년 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서,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3일 0시40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은 안은주씨에게 사망 선고를 내렸다. 전직 배구선수였던 안씨는 옥시가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끝내 보지 못했다. 환경부 산하 가습기살균제피해지원센터에 신고된 1774번째 사망자였다. 향년 54.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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