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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어린이의 온도

등록 2022-05-30 17:59수정 2022-05-31 02:38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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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이안 |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상처받은 내면 아이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내가 본 것은 빛과 하느님이었다. 무언가에 들려서 무엇이라도 꼭 붙들어 악착같이 살고 싶었던 때였으므로 없는 것이라도 만들어 있는 것으로 믿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하느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모습 없이 있는 하느님은 놀랍게도 갓 난 내 두 눈에 빛을 부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나는 들었다). “나를 찾는 데 쓸 빛이란다.” 내가 하는 말이라면 정말로 믿어 주는 어린이에게 들려주려고 이렇게 적어두었다.

“나를 찾는 데 쓸 빛이란다.”// 갓 난 내 두 눈에/ 부어 주고서// 하느님은 숨어,/ 나 오기를 기다리리//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모든 것 속에// 하느님은 숨어서(이안, ‘숨바꼭질’ 전문)

우리에게는 찾아가야 할 무언가가 날 때부터 이렇게 부어졌으니. 그것이 하느님이든 시든 사랑이든 그 무어든 간에.

그러니까 나는 아주 옛날 사람이다. 열살 때에야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왔다. 등잔불 남폿불 촛불에 기대어 사는 산골 마을의 밤은 하늘이 사철 별들로 가득 찼다. 육이오 때 사람 죽은 피가 검은 선지처럼 많이 흘러서일까. 우리 동네 별똥은 모두 선짓재 너머로만 떨어졌다. 옛날 사람 정지용의 어린이와 내 어린이가 다르지 않은 건 바로 이런 대목 때문이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해 두었다// 다음날 가 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정지용, ‘별똥’ 전문)

“다음날 가 보려” 콕(,) 마음에 점을 찍으며 벼르고 벼르기만 하고 끝내 가 보지 못한 시간과 장소. 거기서부터 쉬지 않고 떠나오고 또 떠나왔지만 꼭 그곳에 다시 도착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떠나오려고 기를 쓴 것만 같을 때가 있다. 내 어린이의 최대 관심사는 생존이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든 어떻게든 기를 쓰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어린이는 언제나 자기 생의 맨 앞에 있었다. 어린이의 삶은 전쟁의 최전방에서 치러야 하는 전투 같았다. 어린이가 구사하는 언어는 미지근한 후방의 언어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손바닥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자는 버릇이 있다. 얼핏 잠에서 깨어 보면 아버지는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 주며 이렇게 걱정하셨다. “그러다 마음까지 굳어질라!” 그런데 이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잠에서 깨면 주먹을 너무 꽉 쥐고 자느라 생긴 손톱자국이 손바닥에 짙게 박혀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 보니 나랑은 영 딴판이었다. 주먹을 쥐기는커녕 늘 손바닥을 훤히 내보이며 자는 게 아닌가. 나는 아이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주며 내 아버지와 정반대 걱정을 했다. “그러다 마음까지 물러질라!”

아버지와 나와 내 아이를 생각해 보면 이상하게도 극에서 극으로 유전하는 무언가가 있다. 내 어린 시절의 과부족은 아이에게 이르러 지나치게 넘치는 것이 되고, 특정 시기에 제대로 치러내지 못한 분리의식은 그 나이가 된 내 아이를 껴안고 떠나보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때 내가 꼭 껴안고 떠나보내지 않은 것은 내 아이가 아니었다. 고향과 부모의 품으로부터 폭력적으로 분리되느라 잔뜩 상처를 입고 어른이 된 그때까지도 여전히 내 안에 웅크리고 살고 있던 열네살의 나였다.

생의 에너지로 가득한 이른 봄날, 아직 잎이 나지 않은 나뭇가지는 잘린 채 거꾸로 땅에 꽂혀서도 새잎을 낸다. 나는 살아 있는 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런 생기가 무섭다. 다 자란 모과나무는 겨울 전에 잎을 떨군다. 그러나 어린 모과나무는 겨울이 돼도 잎을 떨구지 않는다. 악착같이 조금이라도 더 자라야 하기 때문에 잎을 떨구고 쉴 시간이 없다. 차가운 겨울 낮에 나뭇가지를 만져 보면 죽은 나뭇가지는 햇볕을 받아 미지근하지만 산 나뭇가지는 아주 차갑다. 산 것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나는 생명이 지닌 이런 본성 같은 것, 생기를 믿는다. 내가 아는 어린이의 온도는 겨울 나뭇가지처럼 차갑고, 차가워서 생기롭고 삼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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