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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차별금지법 없는 선진국은 없다!

등록 2022-05-31 18:20수정 2022-06-01 02:06

대개 차별은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무기한 고용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재중동포 출신 여성노동자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외국인(중국 국적자)으로서 이중차별을 받으며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경제적 착취를 당한다. 결국 다양한 차별에 노출된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 발생하는 잉여가치야말로 한국 사회 자본 축적의 한 자양분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1990년대 말에 나는 몇년간 한국의 한 사립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물론 무늬만 교수였다. 정확한 직함은 강의전임 강사, 매년 갱신해야 하는 3년짜리 계약이었다. 그럼에도 150만원가량인 쥐꼬리만한 월급에서 교수협의회 회비는 꼬박꼬박 원천징수됐다. 일면으로 보면 회비가 징수되는 만큼 교수공동체는 나를 “같은 교수”로 인정해주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었겠다. 문제는, 회비는 꼬박꼬박 빠져나가도 그 교수협의회 모임에 한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외국 국적자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판단을 받은 것일까? 그런데 한국 국적을 신청해 국적이 부여되고 난 뒤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외국 출신”이 문제였는지 “비정규직”이 문제였는지, 나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그저 일상적으로 매일 관찰할 수 있는 차별이라는 현상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1990년대 말 대한민국에서 차별은 공기처럼 그저 일상이었다. 양심상 군에 갈 수 없어 감옥에 갔다 오고 나중에 평생토록 이등시민으로서 차별을 견뎌내야 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지식인 사회 안에서도 종종 “또라이”로 명명됐다. 장애인에 대해서 “병신” 같은 모욕적인 칭호들을 사용하는 것도, 종종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민초들 사이에서 혼혈인을 두고 “튀기”라는 멸칭을 듣는 것도 꽤나 잦은 경험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솔직히 한국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운명적으로 혼혈인이 돼야 할 내 아이가 유치원·학교에서 “튀기” 같은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상상했을 때, 차별이 덜 심한 곳에 가서 육아에 착수하자는 것이 나의 유일한 마음이었다.

그때부터 어느덧 20여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이제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국제화”에 더 성공했다. 현재 한국의 총인구 중에서 외국인 체류자와 외국계 주민들을 다 합치면 거의 5%나 되는데, 이는 동아시아에서 제일 높은 외국계 인구의 비율이다. 국제적 위상도 높아지고, 인구 구성도 다양해지고, 인권운동가들이 치열하게 투쟁해온 만큼 노골적인 차별도 이젠 옛날처럼 가시적이지 않다. 대놓고 약자를 모욕하는 것은 바깥 시선에 노출된 대한민국에서 다소 “구시대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가장 노골적인 차별의 표현들에 종종 시정 조처들이 단행된다. 나는 15년 전에 한국의 지방 도로변에서 “베트남 신부와 결혼하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비용 ○○○원에 장애인도 20대 신부 가능, 숫처녀 보장”과 같은, 그야말로 낯뜨거운 펼침막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펼침막들이 미국 국무부 인신매매보고서에 한 사례로 등장하자 한국 정부는 서둘러 조치를 취했고 최근에는 볼 수 없게 됐다. 국내외 압력이 주효해 과거의 차별 지옥에서 이제 소수자들의 숨통이 그나마 어느 정도 트이긴 했다.

한데 차별이 어느 정도 완화돼도 여전히 피라미드 형태로 구성된 위계와 서열의 한국 사회에서 타자·약자는 평등한 대우를 절대 받지 못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젊은 세대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집단적 구조적 차별에 직면하지 않고 성장했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지난해 (윤 대통령이 폐지하고자 하는) 여성가족부가 진행한 ‘2021년 양성평등 실태조사’ 결과에선, 20대 여성의 73.4%가 바로 그 구조적 성차별을 일상 속에서 몸으로 느낀다고 답했다. 일터에서 여성, 특히 젊은 여성에게 어렵고 귀찮은 일이 다 몰리는 한편, 온라인에서 여혐의 범람을 매일 접하는 것이다.

온라인에서는 여혐만 흘러넘치는 것도 아니다. 특히 각종 게시판이나 댓글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일제강점기의 모욕적인 표현인 “짱깨”나 “짱꼴라” 등을 일상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한국계 중국인(조선족)과 이미 귀화한 과거의 중국 국적 소지자 등을 다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중국 국적의, 또는 중국계 인구가 거의 90만명 정도 되는 나라에서 중국(인)에 대한 인종적 모욕이 아무 제재 없이 판친다. 대개 차별은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무기한 고용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재중동포 출신 여성노동자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외국인(중국 국적자)으로서 이중차별을 받으며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경제적 착취를 당한다. 결국 다양한 차별에 노출된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 발생하는 잉여가치야말로 한국 사회 자본축적의 한 자양분이다.

차별이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경제적 착취와 직결돼 있는 만큼,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이상 근절되기는 힘들 것이다. 한데 겉으로는 덜 나타나도 여전히 일상 속 다반사인 이 차별을 불법화하는 법이라도 있다면 그나마 여성이나 청년, 비정규직, 외국인, 장애인, 동성애자 등이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차별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아니더라도 그 해결을 향해 나아가는 매우 중요한 ‘걸음’이다. 구조적인 성차별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이나 사실에 맞지 않지만 반중국 등 배외주의적 정서에 강하게 호소한 “외국인 건강보험 불공정” 발언 등으로 구설에 오른 윤석열 후보가 결국 대통령이 된 지금 차별금지법은 특히나 시급하다. 윤 대통령 대선 유세 과정에서도 가시적으로 나타난 사실이지만, 한국의 강경 우파는 남녀 갈라치기나 배외주의적 감정에 쉽게 호소하는 등 차별을 정치의 도구로 이용하는 일이 잦다. 이 강경 우파가 집권한 지금에 와서는, 차별금지법이 만약 없다면 한국의 인권 상황이 크게 후퇴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나마 지난 20여년 동안 이룩한 성과들도 잘못하면 잃을 위험이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크게 바뀐 것은 무엇보다 민심, 즉 대중적인 인권 감수성의 수준이다. 강경 우파가 상습적으로 반중국 정서에 호소하는 등 차별을 조장하지만, 지난 4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조사를 보면 우리 시민들의 67.2%나 차별금지법 제정에 긍정적이다. 지금 시민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이미 15년 동안이나 미루어 온 정치인들보다 오히려 훨씬 더 성숙한 평등 지향 의식을 보여준다. 이제 정치인들이 드디어 응답해야 할 때다. 당장에 정계의 관심은 오로지 6·1 지방선거에 집중돼 있지만, 임기가 정해진 선출직 공무원이 누가 되느냐보다 차별에 노출돼 있는 약자들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는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다.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이상 그 어느 정당의 집권도 영구적이지 않다. 그러나 어느 당이 선거에서 이기든 간에, 차별금지법마저도 없는 나라는 결코 선진적 민주사회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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