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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염미정은 해방됐을까?

등록 2022-06-08 18:18수정 2022-06-09 02:38

<나의 해방일지>. 제이티비시 제공
<나의 해방일지>. 제이티비시 제공

[숨&결] 강도희·최연진 | 대학원 박사 과정(국문학)

드라마 정주행을 좀처럼 하지 못한다. 그런데 최근 종영된 <나의 해방일지>는 자세를 고쳐 앉고 첫화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마지막 화를 보며 엄마와 함께 해방을 갈망하고 있었다.

드라마는 경기도 남쪽 산포시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와 함께 살며 서울로 출퇴근하는 세 남매의 이야기다. 대기업에서 팀장, 대리, 계약직으로 일하는 이들은 한 시간 반의 퇴근길 내내 얄미운 동료 직원, 상사의 폭언, 위태로운 통장 잔고 따위를 곱씹다 보니 언제나 지쳐 있다. 제대로 된 연애라도 하면 들끓는 속을 뱉고 설레는 것들로 채워 숨이라도 제대로 쉬겠는데, 차 없고 집 없이 데이트에 꼬박 주말을 반납해야 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요원하다. 차 안 아니면 커플이 어디서 키스를 하냐며 둘째 창희(이민기)는 할부로 차를 사게 해달라 하지만, 대출의 ‘대’만 들어도 대로하는 염씨(천호진)에겐 어림없다. 아버지는 부채에 저당 잡힌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는 알지만, 아들이 제발 좀 가졌으면 하는 미래 ‘계획’이 바로 그 부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모른다.

갑갑한 테두리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드라마의 인물들은 해방을 꿈꾼다. 막내 미정(김지원)은 동료 셋과 결성한 ‘해방클럽’에서 일지를 쓴다. 회사, 인간관계, 이 무거운 몸들을 갖고 살아가는 삶 모두가 해방되고 싶은 대상이 된다. 서울 밖 산포는 노동에서 벗어나 발바닥이나 엉덩이로만 지탱했던 몸무게를 골고루 분산하고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정체불명의 일꾼 구씨(손석구) 또한 과거에서 벗어나 산포로 온 인물이다. 클럽에서 수금을 주 업무로 하던 그는 돈으로 얼굴 붉힌 관계들, 먼저 떠난 사람들을 잊으려 알코올에 의존하며 고립이 자유라 믿는다.

그러나 그곳에도 완전한 해방은 없다. 모두가 말이나 관심의 의무를 비우고 충전되는 와중에 혼자 눈살을 찌푸리고 옆집 남자에게까지 잔소리를 하는 것은 엄마(이경성)의 몫이다. 밭일 중에도 여러 차례 집을 들락거리며 가스 불을 껐다 켰다 해야 하는 엄마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해방을 맞이하기가 더 어렵다. 빨간 날이 없으니 교회라도 다녀야겠다고 한풀이하던 그녀는 유일한 이동수단인 남편의 트럭이 밭에 고꾸라지고 며칠 뒤 집에서 조용히 세상을 등진다. 엄마가 남긴 빨래와 식사를 챙기며 큰딸 기정(이엘)은 엄마가 과로사한 것 같다고 울먹인다.

그제야 아버지는 자식들이 스스로 건사하기를, 누군가를 구속해야 가능한 해방에 머물지 않기를 기원한다. 홀로됨에 대한 청년들의 욕망은 인간에 대한 적대나 개인주의가 아니다. 자기를 돌볼 줄 알게 되면서 세 남매는 홀로 있는 타인들을 초라함이나 실패로 규정하지 않고 안녕을 빌 수 있다. 기정은 강해지는 게 꿈인 싱글 대디에게 약해도 괜찮다 하고, 창희는 7년째 다닌 회사를 나와 임종을 돕는 장례지도사가 된다. 미정은 상호 교환으로만 나타날 수 없는 사랑을 알려주며 사람을 향한 구씨의 적대를 환대로 서서히 바꾼다. 이들의 연애가 다음 단계로 이어지거나 평생직장을 얻어 잘사는 것은 해방과 무관하다. 아프거나 기한이 정해진 것들을 사랑하는 박해영 작가의 인물들은 한계를 좌절이나 폭력이 아닌, 서로 견디는 힘으로 바꾼다. 처음엔 다 같이 창문을 바라보고 얘기했던 해방클럽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마주보고 “출발은 했는데 뭐가 없다”며 웃는다. 그래도 아직 끝이나 바닥이 아니라면, 조금씩 연장하는 순간들에서 우연은 찾아온다. 그것은 바깥이 있다 믿고 지금 여기서 해방되고자 몸부림칠 때는 잘 구상된 나의 진로를 방해하는 불행이지만, 이 계절과는 다를 나, 그것을 만들 미지의 당신을 환영할 때는 조금 다르다. 지하철을 잘못 내려서, 말을 잘못해서, 교실을 잘못 들어가서 시작되는 이들의 행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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