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서한나 | 보슈(BOSHU) 공동대표·<사랑의 은어> 저자
방방곡곡 트럭으로 누비며 물건을 파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영상으로 보는 내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지 <교육방송>(EBS) ‘다큐 시선’ 팀이 만든 ‘만물트럭은 사랑을 싣고’는 시청률 1위다. 영상 속 어르신들은 만물장수를 기다린다.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마을의 어르신은 한시간 걸어 내려와 메밀을 사고, 한시간 걸어 올라간다. 어르신은 동네에 가겟집도 술집도 있었던 과거를 회상한다. 나는 다이소와 호프집이 없는 곳을 상상하지 못하겠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대전에 다이소가 사라질 일은 없을 거라고 안심해도 좋을까? 그러나 지역소멸은 물리적인 사라짐으로만 오지 않고 기억을 잃어버리는 식으로도 온다.
서울을 기록하는 사람이 많다. 매거진 에디터는 ‘서울에 산다는 것’ 따위 기획을 자주 한다. 뮤지션, 건축학자, 시인, 인스타그래머, 그리고 이들의 친구들이 글을 쓴다. 서울은 존재한다. 동경 126˚ 45' 55"~127˚ 11' 06", 북위 37˚ 25' 32"~37˚ 41' 55"에 있을 뿐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
폴 오스터는 ‘<뉴욕>지의 질의에 대한 답변’이라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뉴욕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센트럴파크 남쪽의 콜럼버스 서클 모퉁이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네 60층 아파트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풍경이다.”(<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에서 재인용) 이 글은 대도시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환상에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뉴욕’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만으로 어떤 장면이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뉴욕에 그러하듯 서울에 페티시를 갖지 않을 수 있나. 질문을 바꾸어, 나주와 안성과 영광에 같은 값의 환상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나. 지방에서 10년, 서울에 10년 살고 자신을 서울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은 충동을 누를 수 있나. 서울사람이라는 것은 도회적인 취향이나 감식안, 만만찮은 경험치 따위를 보장해주는 상징으로 쓰인다. 서울은 자본주의만큼이나 섹시하다. 나는 이것을 이기고 싶다.
서울은 섹시하다. 또 아름답다. 현대인 누가 서울에 페티시를 갖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지방은 왜 그런 문화자산을 가질 수 없을까. 사진은 남산과 이태원동 주택가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서울의 한 루프톱 바.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은 아름다움을 독점한다. 기록과 해석, 창작자를 독점하는 것으로. 우리는 서울에 인프라와 인구가 집중돼 있다는 것을 비판하지만, 모두가 서울에 관심 있다는 것에는 관심 없다. 한 지역이 서울과 얼마나 가까운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하기를 벗어나 장소 자체로 볼 수 있겠는가. 서울은 존재만으로 문화적 타자를 수없이 만들어낸다.
오늘날 서울은 과잉이라는 자신의 특성에 질려 하면서도 내심 그것을 즐기는 듯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피로와 환락을 모조리 알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정치·경제·사회·문화에 관해 중요한 일들은 서울 복판에서 벌어진다. 진정한 쉼도 한강에서 자전거 타는 것으로 가능할 것 같다. 서울의 피로를 이기고 서울에 위로받는 나에게 취할 수 있다면 우리는 현대인일 수 있다.
서울사람에게 대전은 경유지다. 대전사람에게 서울은 목적지다. 마르크스처럼 말하면 대전사람이 잃을 것은 케이티엑스(KTX)뿐이다. 서울은 문화를 욕망하는 사람의 욕망을 흡수했다. 서점에 망원동에 관한 책은 있지만 가수원동에 관한 책은 없으며, 있어도 안 팔릴 것이다. 상상할 수 있겠나. 교실에서 “지방방송 꺼라”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가 지방방송국에서 사명감 있는 피디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우리는 글에 ‘감곡리’나 ‘탄현면’을 쓰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지역 간 불균형을 수도 이전이나 대기업 유치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위계와 상징권력이라는 개념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이념과의 싸움에서 실패한다. 그럼에도, 장소에 품을 환상과 호기심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