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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필수노동자와 제대로 된 대우

등록 2022-06-19 18:09수정 2022-06-20 02:10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가 지난 14일 오후 경기도 의왕 내륙컨테이너기지(ICD) 앞에서 파업 8일차 집회를 열고 있다. 의왕/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가 지난 14일 오후 경기도 의왕 내륙컨테이너기지(ICD) 앞에서 파업 8일차 집회를 열고 있다. 의왕/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세상읽기]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2013년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스트라이크!>라는 잡지 창간호에 ‘오로지 인간을 일하게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생겨난 의미없는 일자리가 있다’는 글을 게재했다. 구체적 예로 인사관리 컨설턴트,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터, 금융전략가, 기업 법무팀 변호사 등을 들며 이를 ‘불쉿 잡’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직업의 종사자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의미하다고 여긴다고 주장했다. 이 충격적인 글은 순식간에 100만건 이상 조회수를 기록하고 17개 언어로 옮겨졌다.

더 충격적인 건 글에 대한 반응이었다. 실제 그레이버가 언급한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의 자기고백이 이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직업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글에 등장한 문장을 활용한 여론조사까지 생겨났다. 영국에선 “당신의 직업은 세상에 의미있는 기여를 하는가”에 37%가 그렇지 않다고, 네덜란드에선 노동자의 40%가 자신의 업무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답했다. 이런 반응에 힘입어 나온 책이 그의 유작이 된 <불쉿 잡>이다.

이 책에서 그레이버는 ‘힘든 직업’을 ‘무의미한 불쉿 잡’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며 이를 ‘쉿 잡’이라 부른다. 불쉿 잡이 별다른 의미도 기여도 없이 보수가 높은 화이트칼라 직종이 주를 이룬다면, 쉿 잡은 사회에 꼭 요구되는 육체노동이 주를 이룬다. 그레이버는 불쉿 잡에 종사하는 이들이 없다고 해서 이 세상이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이 쉿 잡 노동자들이 일주일만 멈춰도 세상은 엉망이 될 것이라 말한다.

더하여 쉿 잡의 사회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다양한 연구결과도 보여준다. 한 예로 영국에서 연봉 500만파운드(약 79억원)를 받는 은행가들은 보수 1파운드당 7파운드 정도의 사회적 가치를 파괴한다. 반면 연봉 1만 3000파운드를 받는 병원 청소부는 1파운드당 10파운드 정도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다.

코로나 위기가 닥친 뒤 그레이버가 언급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인력의 실체가 더 명백해졌다. 모두가 온라인 비대면으로 전환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안전과 일상을 위해 대면 서비스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은 의료·돌봄·물류·교통·배달·청소 등과 같은, 그레이버가 말하는 쉿 잡에 해당하는 집단이었다. 그제야 우리는 이들을 필수노동자라 부르며 뒤늦은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지금 세계 곳곳에서 필수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영국에서는 철도해운운수노조가 최대 2500명으로 예고된 정리해고에 맞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사회복지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이들이 최저임금을 인상해달라고, 프랑스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종사자들이 인력부족을 해결해달라고, 아랍에미리트에선 배달노동자들이 배달료 현실화를 요구하며 나섰다. 우리나라도 화물연대가 사실상 최저임금제인 안전운임제를 지키기 위해 파업에 나서 8일 만에 극적 타협을 이뤘다.

돌아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코로나 시대에도 대기업은 위기에 대한 부담을 거의 지지 않았다. 오히려 2021년 매출 ‘1조 클럽’ 기업이 전년도보다 25곳 늘어 229개사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게다가 경제 불확실성을 이유로 대기업의 현금보유액도 늘어났다. 한편 평소에도 비정규직보다 사회보험의 혜택을 더 누리는 정규직 역시 그다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정작 가장 많은 부담을 진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필수노동자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사회보험이 없어 위기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해고되기 더 쉬운 비정규직, 특수고용, 용역직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로 접어든 지금, 지속적인 코로나 영향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부분의 일손은 여전히 모자란다. 기업과 노동 중 이 부담을 최종적으로 더 안게 되는 이들은 누구일까? 노동자 중에서도 누가 더 많은 부담을 안게 될까? 코로나 시대의 경험과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필수노동자들의 파업은 그 답을 알려준다.

화물연대 파업으로 피해가 막대하나 참여율은 높지 않다’거나 ‘화물차주는 노동자가 아니기에 파업은 불법이라면서도 업무개시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모순적 언론 보도는, 우리 사회가 이 필수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선명한 지표다. 결국 우리에게 필수노동자란 감사하지만 보호해줄 필요는 없는 이들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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