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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모내기와 이야기

등록 2022-06-22 15:13수정 2022-06-23 02:37

2022년 6월 모내기 체험 행사를 위해 수박 할아버지가 직접 그리고 쓴 설명문. 사진 이길보라
2022년 6월 모내기 체험 행사를 위해 수박 할아버지가 직접 그리고 쓴 설명문. 사진 이길보라

[숨&결] 이길보라 | 영화감독·작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재밌는 일이 생겨. 봄이 올 때는 매실의 꽃이라며 매화나무의 가지를 손수 꺾어주더니 여름의 초입에는 직접 기른 오이를 가져다주시더라. 수박 할아버지 말이야.

얼마 전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요가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어. 문을 열자 주홍빛이 쏟아졌어. 살구 같기도 하고 감 같기도 한 열매를 가지째 든 모습을 보고 그만 웃음이 터졌어. 어디 사느냐고 물어서 공원 옆 맨션에 산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기억하고는 찾아오신 거야. 이게 도대체 뭐냐고, 먹는 거냐고 하자 ‘비와’(비파)라고 했어. 처음 보는 과일이라고 하자 껍질을 벗겨서 먹으면 된다고, 이맘때쯤 먹을 수 있는 열매라고 했어. 고맙다고 인사하자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냐는 듯 할아버지는 등을 돌렸어. 답례로 뭐라도 드릴까 했는데 그럴 겨를도 없었지. 조심히 들어가시라고 소리치니 등 뒤로 손을 ‘쿨하게’ 흔들며 사라졌어. 그 유유자적한 발걸음이란. 동네에 오래 산 주민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어.

어느 날은 바다가 보이는 동네 공유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창밖으로 누군가 손을 흔들었어. 수박 할아버지였지. 일하던 중이라 짧게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할아버지가 사무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종이 한장을 건넸지.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지난번에 모내기를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느냐고, 일본어를 잘 못하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안내문을 만들어봤다고 했어. 빨간색과 파란색, 초록색, 검정색 매직을 사용하여 그리고 쓴 안내문에는 사람과 사람이 일정 간격의 거리를 두고 서서 모를 심고 있었어. 모의 간격은 몇 센티미터가 되어야 하는지, 심어야 하는 모의 개수는 몇개인지, 얼마만큼의 깊이로 심어야 하는지 적혀 있었지. 물론 그림과 숫자 말고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어. ‘이걸 나를 위해 그렸단 말이야?’ 감동한 얼굴로 쳐다보자 할아버지는 또 ‘쿨하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어.

대망의 모내기 날, 파트너와 함께 약속한 장소로 향했어. 집 앞에는 사람들로 가득했어.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었지. 생각보다 인원이 많아 놀랐는데 더 놀라운 건 할아버지가 준비한 것들이었어. 안내문을 비롯해 종이상자 뒷면을 재활용하여 논의 위치와 차를 댈 곳을 표시한 약도, 일정한 간격으로 모를 심기 위해 간격을 표시한 막대기, 간격에 맞춰 꽂을 대나무, 모내기를 하다가 힘들면 앉아 쉴 수 있는 의자 여러개, 더러워진 팔과 다리를 씻을 수 있는 양동이와 플라스틱 대야, 배관에 연결해 물을 댈 수 있는 긴 호스까지. 모내기 체험 행사 참가자들을 위한 물품들이 트럭에 실려 있었어.

논에 도착하니 3분의 2 정도에는 이미 모가 심겨 있었어. 논 가에는 이앙기가 있었지. 할아버지는 이 자리에 모내기를 할 거라며 방법을 일러주었어. 아이들은 신나게 진흙을 던지며 첨벙거렸고 어른들은 서로를 소개하며 인사했지. 그중에는 일본으로 유학 온 중국계 프랑스인도 있었어. 국적과 세대를 뛰어넘는 모내기였지. 순서를 바꿔가며 모를 심는데 할아버지가 내게 이앙기를 몰아 보겠냐고 물었어. 기쁘게 올라탔지. 안내에 따라 시동을 걸고 속도를 조정하며 운전대를 잡았어. 잘한다고 소질 있다고 엄지를 척 내미는 할아버지를 보고 생각했어. 뭐야, 엄청나게 다정한 사람이잖아?

세 시간 남짓 지났을까. 모를 다 심고 나니 할아버지가 수고했다며 미리 준비한 꾸러미를 내밀었어. 밭에서 수확한 감자, 오이, 토마토 등의 채소가 담겨 있었어. 수확할 때쯤 되면 쌀을 가져다주겠다고, 콤바인을 몰고 싶다면 그것 또한 좋다고 했지.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어. 어쩌면 이게 동네의 감각일지도 몰라. 올해 나의 목표는 수박 할아버지와 우정을 쌓아 나가는 거야. 알고 보니 그 누구보다 다정한 할아버지를 떠올려. 나도 그런 주민이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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