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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한국에는 오지 못한 68혁명

등록 2022-07-05 18:35수정 2022-07-06 02:07

대부분 ‘무혈’이었던 유럽의 1968년 혁명과 다르게,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많은 경우 고문이나 죽음까지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혁명의 ‘대상’도 달랐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지향은 ‘정치적 변혁’, 바로 독재 타도였다. 개혁을 지향하는 민간 정치인의 집권이 운동에 참여한 다수가 바랐던 ‘승리’였고, 사회 전반의 권위주의는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됐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1년 전 국내 한 대학에서 몇개월을 보냈다. 오래간만에 한국에서 장기체류하면서, 유럽 어느 도서관에도 없는 귀중한 자료들을 국내 대학 도서관에서 찾아내 읽는 것은 잊지 못할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그 대학과 내게 익숙한 오슬로대학의 분위기가 본질에서 다르다는 사실도 실감할 수 있었다. ‘다름’에 관해 얘기하자면, 한국 대학들이 최근에 지은 최신형 건물들은 유럽 어느 대학과 비교해도 ‘최첨단’ 그 이상으로 보인다는 것도 가시적 차이라면 차이였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외견상의 차이보다 맨눈으로 보이지 않는 인간관계 구축 방식이나 권력관계 작동 방식의 차이였다.

늘 생각하는 바지만, 나는 대학의 가장 위대한 주인공은 청소노동자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다양한 방식의 온라인교육이 가능한 시대에는, 교원들은 다수가 몇개월 동안 출장이나 휴가를 가도 대학은 그런대로 잘 돌아갈 수 있다. 한데 화장실 청소를 하루라도 안 하면 악취나 불편함 때문에 대학에서 연구도 교육도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슬로대학에서 학생이나 교원, 행정직원들이 청소노동자와 복도에서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하는 관례를 늘 ‘정상’으로 생각해왔다.

나도 집에서 청소 담당인지라 체험적으로 아는 일이지만, 만성 요통 같은 질환이 많아지는 중년에게 청소노동은 글을 쓰거나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거기에다 오슬로대학에서는 청소노동자들이 교원이나 행정직원들과 같은 노조 소속이라 ‘동료’라는 의식이 강하다. 한데 한국의 대학에서 나는 청소노동자에게 먼저 인사하는 교수를 본 적이 없다. 교수와 청소노동자들이 같은 노조에 소속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같은 교수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조가 각각 다르고, 두 노조가 함께 협력하며 투쟁하는 일도 거의 없다.

골수 커피중독자인 나는 한국 대학에서 판매되는 커피가 오슬로대학 커피보다 고급이라고 생각한다. 맛도 그렇지만, 값은 오슬로의 절반도 안 돼 ‘천국’처럼 느껴질 정도다. 한데, 각자가 자신이 마실 커피만 사는 오슬로 카페테리아 풍경과 달리, 한국 대학의 카페테리아에서는 비교적 젊어 보이는 (다수가 여성인) 구성원들이 커다란 테이크아웃 캐리어에 커피 몇잔과 냅킨 등을 싸가지고 어디론가 들고 가는 상황을 매일 볼 수 있었다. 이야기해보면 어느 ‘교수님’이나 ‘선배님’들에게 ‘갖다 드리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자발적 친절’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한데 최근에 문제가 된 대학교수 출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갑질’ 의혹 이야기를 들어보면, 꼭 ‘자발적 서비스’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커다란 테이크아웃 캐리어를 손에 들고 먼 연구동을 향해 올라가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교수님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조교’라는 신분의 여성들이었을까.

이런 차이 하나하나를 열거하자면 책 한권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교수의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 결과를 제출받아 교원회의 해당 교수들 면전에서 그 교육방식의 개선 등을 요구하는 오슬로의 학생대표 모습은, 아마도 많은 한국 교수들에게 ‘비정상’으로 보일 것이다. 한데 오슬로에서는 그건 통상적 절차에 불과하다. 회의의 내용이나 순서는 물론이고, 그 회의 참석자들의 겉모습도 확연히 다르다. 한국 대학 사회에서 아직도 흔히 볼 수 있는 정장이나 넥타이를, 노르웨이 대학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차이들을 하나씩 열거하는 것보다는, 그 ‘기원’이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해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다.

처음부터 비권위주의적 근대사회란 존재한 적도, 존재할 수도 없다.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이 한창 진행됐던 1950년대 노르웨이만 해도, 고소득 공무원이었던 교수와 그 학생, 대학 시설노동자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었다. 대학이나, 나아가서 사회 전체에서 매우 수직적이었던 각종 관계를 수평화시키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다름 아닌 1968년 반권위주의적 혁명이었다. 대학에서 정장이나 넥타이가 안 보이게 되고, 학생대표들이 행정참여권을 얻은 것도 그 이후부터다. 물론 수백년 동안 굳어져온 권위주의 문화가 한꺼번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커피 심부름’ 따위 일상생활 속 ‘갑질’이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없어진 것은, 1968년의 혁명을 몸으로 체험하고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세대가 1970~80년대에 대학 부문을 포함한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뿌리를 내리고 나서다.

한국의 1960~80년대는 유럽보다 훨씬 더 혁명적인 시기였다. 대부분 ‘무혈’이었던 유럽의 1968년 혁명과 다르게,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많은 경우 고문이나 죽음까지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혁명의 ‘대상’도 달랐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많은 급진파도 포함했지만, 공동의 지향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변혁’, 바로 독재 타도였다. 개혁을 지향하는 민간 정치인의 집권이 운동에 참여한 다수가 바랐던 ‘승리’였고, 사회 전반의 권위주의는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됐다. 이런 풍토에서는, 한때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이철이 2005∼2008년 철도공사 사장을 지내며 파업에 나선 비정규직 여승무원들을 해고한 사례처럼, 과거 민주화 투사들이 사회문제에서는 ‘진보’의 반대편에 서는 게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유럽의 1968년 혁명 주역들은 대개는 ‘집권’을 바라지 않았으며, 정치적 변화 이상으로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비롯한 탈권위·수평화를 지향했다. 비록 이들이 최종적 목표로 삼았던 생태친화적이며 평화주의적인 민주적 사회주의는 건설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이룬 권위주의 타파나 인권 신장은 노르웨이를 포함한 유럽 사회들을 영구적으로 바꿔놓았다.

오늘날 한국은 사회적 혁명을 지향할 만한 결집력이 사라진 극도로 원자화된 사회다. 그럼에도 비정규직 노동운동가들을 비롯한 이 사회의 진정한 진보세력들은 극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갑질’ 등과의 투쟁을 지속한다. 참여는 못 하더라도 이 투쟁에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것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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