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는 2010년대 멘토, 힐링 등의 열쇳말을 반영하기도,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슬기로운 기자생활] 이지혜 | 경제팀 기자
지난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6%를 돌파했다는 기사를 쓰면서 ‘아이엠에프(IMF) 때'의 스산한 기억이 떠올랐다. 기사에서는 그 시절을 ‘1997년 외환위기 때'라고 써야 하지만 여전히 내 입말에는 ‘아이엠에프 때'가 더 착 달라붙는다.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아이엠에프는 그저 국제통화기금으로 번역되는 국제기구가 아니라, 지독하게 어두웠던 환란의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도 ‘아이엠에프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 집으로 수시로 빚쟁이가 찾아오고, 엄마가 자주 울어도 당시 일곱살이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티슈 몇장 뽑아다 건네주는 게 전부였다. 당연히 그때는 왜 갑자기 그렇게 변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들에게 이유를 물어도 ‘나라가 망했다’는 대답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학교에서 유행하던 ‘6공 다이어리’가 나만 없어 친구들 앞에서 창피했던 기억과 경제위기 와중에 태어난 막내 분유 값도 버거워하던 부모님에게 철없이 다이어리 사달라고 조르다 미안해졌던 기억만은 아직도 뚜렷하다. ‘아이엠에프 때’ 취업난을 겪은 ‘아이엠에프 학번’은 아니지만, ‘아이엠에프 키즈’는 되는 셈이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이 된 뒤에야 그 많은 빚을 겨우 해결하셨다. 물론 그쯤이면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아이엠에프 때 무너져서 일어나지 못한 친척이나 친구네가 여럿이다.
‘아이엠에프 때’의 영향은 실패 또는 재기하는 과정에서 해소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1997년을 기점으로 뿌리내린 신자유주의적 사회구조와 가치관이 삶을 규정하고 잠식했던 탓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걸핏하면 “네 옆에 앉은 애는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라고 말했다. 부모들도 자기 불안을 아이들에게 투영하며 내 아이의 낙오를 막을 사교육에 매달렸다. 이런 게 내 주변 이야기일 뿐일까. 옛 기사를 찾아보면, 1997년 이후 하위 60% 계층은 10년 넘게 외환위기 이전 가계수지(수입―지출)를 회복하지 못했는데, 급격히 늘어난 교육비 지출이 주요인으로 분석됐다.
치열한 경쟁을 몸에 새기며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우리 세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자기계발서의 얕은 위로를 받으며 취업용 스펙 쌓기나 공무원시험에 매달렸다. 각자도생의 교육을 받은 아이엠에프 키즈 중 일부는 지역균형전형으로 대학에 온 친구를 ‘지균충’(지역균형+벌레)이라 부르고,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에 분노하는 어른이 됐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결과인 노동시장에서의 열악한 지위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이엠에프 때를 계기로 강화된 경쟁과 각자도생의 교육과 문화가 우리 마음에 깊은 흉터를 남긴 결과다.
코로나19라고 아이엠에프와 다를 게 있을까. 코로나19가 불러온 경제위기도 어떤 방식으로든 이 사회와 가정들에 또 다른 상처를 입히고 있을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로서 경제위기라는 터널을 무사히 지나는 처지지만, 기획재정부 기자실에 앉아 건조한 숫자를 들여다보노라면 나도 몰래 섬뜩해질 때가 있다. 가파르게 우상향하는 청년층 자살률을 볼 때, 비교적 안정적인 중숙련 일자리는 줄고 근로기준법 적용도 못 받는 불안정 일자리는 무섭게 늘어나는 흐름을 볼 때다. 그 숫자 뒤에 숨겨진 풍경들이 세월이 흐른 뒤 어떤 가혹한 부작용으로 돌아올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코로나 키즈’들이 어떤 상처를 받고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는 이제 나 같은 ‘아이엠에프 키즈’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장의 주도적 역할과 긴축재정을 강조하며 부자감세에 앞장서는 정부가 걱정스럽다. 그래도 24년 전엔 엄마 눈물을 닦아주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이제는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관료들을 취재하며 이런저런 점을 따져 물을 수는 있다. ‘취약계층 지원’에 관한 질문에 “돈이 없다”는 답변을 듣노라면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무사히 살아남아 기자가 된 아이엠에프 키즈로서 ‘코로나 키즈’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덮어줄 수 있다면 그깟 무력감쯤은 이겨내야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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