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광장에서 참가자들이 대형 무지개 깃발을 들고 있다. 김명진 기자
[숨&결] 정민석 | 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
말 그대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행진이 시작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눈앞을 가리는 장대비였다. 다른 축제 같았으면 참여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행사가 중단됐을 텐데,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시청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달랐다. 1년 중 단 하루, 나 자신을 안전하게 드러낼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참여자들 얼굴에는 오히려 행복감과 해방감이 가득했다.
6색 무지개를 비롯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논바이너리를 상징하는 다채로운 색깔의 깃발들은 참여자들의 손과 손을 이으며 쉼 없이 펄럭였고, 두려움이 아닌 자긍심으로 내딛는 발은 가볍기만 했다. 쏟아지는 비도, 혐오 가득한 말도, 이들의 행진을 방해하지 못했다. 자연이 선물한 흠뻑쇼 현장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비를 벗 삼아 행진하는 사람들과 웃다 보니, 그 행복감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했다.
2000년 50명 남짓 모였던 참여자들의 행진으로 시작된 서울퀴어문화축제가 명실공히 시민들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가면을 써도 선뜻 나서기 힘들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국적과 연령,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축제의 장이 되었다. 올해로 23회째로 개최된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시민사회는 물론 각국 대사관,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기업들도 참여하고 있다. 차별에 억눌려 있던 성소수자들에게 나의 해방일지를 쓸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광장은 성소수자들에게 단 한번도 쉽게 허락된 적이 없다. 보수정권이 들어서며 더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 민주당 집권 시기에도 편한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성소수자 인권에 관해 기득권 정당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고, 우후죽순 자라나는 혐오에도 그동안 그 어떤 대처도 하지 않았다. 차별금지법 역시 미온적인 정치권의 태도로 인해 15년째 제정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시 열린광장시민위원회는 이날(16일) 단 하루만, 신체 과다노출과 음란물 판매 및 전시 등을 안 하는 조건으로 광장 사용을 허용했다. 퀴어는 여전히 청소년에게 유해한 존재였고, ‘우리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광장 사용은 늘 검열받아야 했다.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공공연하게 밝혀온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번에도 선량한 풍속을 위반하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현장 채증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음란’과 ‘노출’이라는 단어로만 퀴어문화축제를 바라보는 이들로 인해 성소수자들은 조건부 시민이 됐고, 광장은 절반만 열렸다. 하지만 퀴어문화축제 현장을 찾은 이들은 알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노출’은 나다움을 드러내는 자긍심이고, 날카로운 혐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이들이야말로 평등과 자유의 가치를 배워나가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유해한지를.
시대가 변했다고 말한다. 이제 방송에서도 성소수자 콘텐츠가 쉽게 소비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퀴어문화축제가 지나온 역사만 살펴봐도,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는지, 그 끝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절반만 열린 광장을 활짝 열게 해준 것은 누구도 배제돼서는 안 된다며 함께 목소리 높여준 이들이다. 또한 광장을 믿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나온 성소수자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광장에 나란히 선 이들이야말로 시대가 변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행진은 단 하루로 끝났고, 다시 일상이 시작됐다. 나 자신을 숨겨야 하고, 소수자의 삶에 무관심한 끔찍한 정치가 있는 곳, 삶 곳곳을 침범하고 있는 차별을 견뎌야 하는 그 일상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광장에서 느꼈던 해방감은 여전히 가슴 뛰게 한다. 제23회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슬로건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를 마음에 품고, 일상이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저항하며, 광장에서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다. 그때 망설이고 있는 당신도 함께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