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서한나 |보슈(BOSHU) 공동대표·<사랑의 은어> 저자
내게는 교양수업에 들어갔는데 존경하는 작가가 넌 글을 쓰지 말아야겠다, 말한 뒤 다음날 술을 사준 일화가 없다. 글을 쓰러 연희동에 오가게 된 지금도 그런 재미난 사건은 생겨날 일 없지 싶은데, 그런 것에 따라나서기에 나는 힘이 없고 좋아하는 문인은 나보다 지쳐 보이며, 무엇보다 그라면 술을 사주며 인생 이야기를 하려고 들지 않을 것 같다.
10년 전쯤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그 일화를 쓸 수 있을 테니까. 글에서 선생과의 시간을 추억하는 자는 과거의 자신이 원하던 모습으로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말하자면 작가로.
읽을 것을 찾다가 알게 된 것이 있다. 소설 뒤에 붙은 작가의 말을 읽는 게 때로 작품보다 재미있다는 것. 거기에는 가장할 수 없는 진심이 있다. 로봇경진대회나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우승한 사람의 소감에도 진심이 있을 텐데, 하필이면 글 쓰는 인간의 소회가 궁금한 걸 보면 나도 쓰는 일이 좋은가 보다.
그러니 열일곱에 무작정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를 잡아탔어야 하는 것이다. 성북동의 주택 앞에서, 대문호가 사는 그 집 앞에서, 제자로 받아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선언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게 내가 들어온 성공 스토리의 시작이다.
뜻을 품은 사람들은 집과 가족을 떠나 서울로 간다. 양파 껍질 까고 대걸레질하다 3년 만에 팬 잡는 법을 배웠다는 중식 셰프 이야기를 우리는 각기 다른 채널에서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단칸방에서 등 배겨가며 잠을 자고 새벽부터 비질을 하며 기약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갈 만큼 정력적이지 않다. 직장·주거 근접의 원칙을 따르고만 싶고, 남의 집에 세 들지 않은 채로 천재 스승들과 가까이 살고 싶다.
내 고향 가수원에서도 문인 모임이 열리고, 대전에도 내 또래가 모이는 창작 공간이 있지만, 같은 시각 망원동과 성수동 일대에는 조금 다른 기운이 돈다. 여기서도 무슨 일인가가 생기고, 그것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곳의 일들은 기록되고 확장된다. 기획자, 편집자, 독자, 기자가 드나들기 때문에. 거기서라면 의욕적인 이들을 만날 수도 있다. 그들과 플리마켓, 팝업 술집을 열고, 누군가와 눈이 맞아 미친 듯이 책을 출간해댈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밀다 요란한 이들과 친구가 되어 ‘(실제로) 지금 가장 눈에 띄는 작가’ 따위로 문화계에 데뷔할 수도 있다. “힙스터가 되어라, 그러면 책을 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앤디 워홀이 곧 할 것 같다.
나는 힙스터가 아니지만 책을 냈고, 책을 냈지만 내가 작가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지역을 주제로 한 청탁이 이어질 때, 내가 충청의 인간문화재가 아닌가 의심한다. 과장을 더하자면 어떤 이들은 충남 웃다리농악에 대하여 내가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오해는 금물…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내가 비관하는 건 과거이며 그것이 누적된 세상이다.
효자동에 사는 작가는 서울 작가로 소개되지 않을 것이다. 유럽에 가면 아시아 작가가 되는 경험을 하겠지만 한반도 안에서는 그저 작가일 수 있다. 한 사람을 싸고도는 온갖 정체성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보는 게 재미있지만, 가끔 나는 다른 활동가들처럼 말하게 된다. “이 운동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원해요. 내가 일자리를 잃기를 바랍니다.”
나는 계속해서 서울중심주의를 짚는 글을 쓰겠지만, 지면 앞에서 만나는 역설 또한 여전할 것이다. 쓰되, 어떤 것에 대해 특히 더 쓰게 될 것이다. 읽히되, 어떤 식으로 더 많이 읽힐 것이다. 성별을 잊고 나이를 잊고 종내에는 자신을 잊고 싶다. 진공상태에서 쓰는 글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