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에다의 ‘9·11 테러’로 상처받은 패권국의 최고사령관 조지 부시는 이듬해 의회 연두교서(2002년 1월29일)에서 북을 이란·이라크와 묶어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북을 미국의 ‘3대 주적’의 하나이자 “선제공격으로 정권교체를 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부시 행정부가 ‘제네바 기본합의’를 사실상 파기하자, 북은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8년간 유지한 영변 핵시설의 동결 조처를 빠르게 되돌렸다. 그러곤 마침내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을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판도라의 상자 틈새로 빠져나온 2차 핵위기가 한반도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2000년 미국 대선(11월7일)에서 ‘플로리다 검표 논란’ 끝에 연방대법원이 5 대 4로 조지 부시의 손을 들어주자, 너무도 많은 게 바뀌었다. 부시는 ‘에이비시’(ABC: Anything But Clinton)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딕 체니(부통령), 도널드 럼스펠드(국방장관), 폴 울포위츠(국방부 부장관), 존 볼턴(국무부 차관보) 등 강경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은 ‘제네바 기본합의’를 “저자세 외교의 극치”라며, “우리는 클린턴과는 정반대의 대북정책을 펼 것”이라고 떠들었다. 부시 행정부 초대 국무장관인 콜린 파월의 비서실장을 지낸 로런스 윌커슨은 이들을 “대통령 집무실의 비밀결사”(Oval Office Cabal)라 멸칭했다. 부시 행정부의 출범(2001년 1월20일)과 함께, 1994년 10월 이후 북-미 관계와 한반도 평화의 안전판 구실을 하던 ‘제네바 기본합의’ 체제가 무너져 내리고 한반도에 2차 핵위기의 먹구름이 짙게 깔릴 터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빌 클린턴 대통령과 협력해 어렵사리 가꿔온 한반도 탈냉전의 흐름이 끊길까 노심초사했다. 취임 두달도 안 된 부시를 만나러 워싱턴에 간 까닭이다. 그러나 2001년 3월8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는 “나는 북한 지도자에 의구심(skepticism)을 가지고 있다”고 냉랭하게 말했다.
2001년 9월11일, 알카에다의 항공기 자살 테러로 뉴욕과 워싱턴이 쑥대밭이 됐다. ‘9·11 테러’다. 상처받은 패권국의 최고사령관인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부시는 “중립지대는 없다. ‘적과 동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세계를 윽박질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부시의 편’이 되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북은 ‘9·11’ 발생 이틀 뒤인 9월13일 외무성 대변인을 내세워 “유엔 회원국으로서 모든 형태의 테러, 그리고 테러에 대한 어떤 지원도 반대하며 이러한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두달 뒤인 11월3일 외무성 대변인이 다시 나서 ‘테러자금 조달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과 ‘인질 억류 방지를 위한 국제협약’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고 <조선중앙통신>으로 발표하고, 실제 가입했다.
김정일의 구애는 효과가 없었다. 2002년 1월29일 부시는 의회 연두교서에서 북을 이란·이라크와 묶어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했다. 북을 미국의 ‘3대 주적’의 하나이자 “선제공격(preemption)으로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3월13일엔 북을 핵공격 대상에 넣은 ‘핵태세검토보고서’(NPR)를 내놨다. 볼턴은 한 연설(2002년 5월)에서 “악의 축 세 나라 가운데 첫 군사공격 목표는 이라크, 그다음은 북한, 세번째가 이란”이라고 ‘예고’했다.
김대중은 부시의 폭주를 어찌 제어할지 부심했다. 2002년 2월20일 청와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대중은 설 연휴(2월10~13일)를 활용해 워커힐의 한 빌라에 머물며 ‘부시 설득 논리’ 마련에 골몰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부시는 김대중과 만나 “햇볕정책을 지지한다”고 했고, 경의선 남쪽 구간 최북단역인 도라산역을 찾아 철도 침목에 “이 철로가 한국의 이산가족을 재결합시켜주기를”(May This Railroad Unite Korean Families)이라 적었다. 한반도의 탈냉전과 영구 평화를 바라는 김대중과 한국인은 환호했다.
그뿐이었다. 부시는 2002년 5월 상원의원들과 만남에서 김정일을 “피그미” “만찬 테이블을 망쳐놓는 아이” 따위의 말로 조롱했다. 부시 행정부 백악관 회의에 날마다 참석한 ‘미 정보기관 관리’는 “부시와 체니는 김정일의 목을 베어 쟁반에 올려놓고 싶어 했다”고 회고했다. 부시는 2002년 2월 김대중과 회담에서도 “김정일은 자기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악랄한 독재자”라며 “북한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어 북한 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고 회담에 배석한 임동원이 전했다.
부시의 이런 속내가 민낯을 드러내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단장으로 한 대통령 특사단의 평양 방문(2002년 10월2~5일)이 제2차 한반도 핵위기를 일으킬 뇌관이었다.
애초 부시의 대북특사 방안은 바람 앞의 한반도 평화를 지키려는 남북 협력의 산물이었다. 김정일은 대통령 특사로 방북한 임동원을 2002년 4월4일 백화원영빈관에서 만나 “(부시가) 더는 험담을 하지 않는다면 나도 김(대중) 대통령의 권고를 받아들여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어요. 미국 국무부 대사가 오겠다면 와도 좋겠지요”라고 ‘특사 방안’을 꺼내들었다. 서울로 돌아온 임동원은 이를 워싱턴에 전했고, 2002년 4월30일 백악관 대변인은 “북한이 프리처드 대사를 초청했으며 미국은 이를 수용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참을 미적거리던 부시 행정부는 대북협상 창구인 잭 프리처드는 “클린턴 행정부의 잔재로 북한에 저자세이고 신뢰할 수 없다”며 배제하곤 켈리를 단장으로 지목했다. ‘협상’이 아닌 ‘일방적 통보’ 의무를 떠안은 특사단장 지명에 켈리는 “날벼락 인사”라며 난감해했다. 켈리는 10월3일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만나 “북한의 고농축우라늄계획(HEUP)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며 “이 계획의 폐기가 대화의 전제조건”이라고 통보했다. 김계관은 “그런 계획은 없다”고 즉석에서 부인했는데 다음날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미국이 핵무기로 우리를 ‘악의 축’이라며 ‘선제공격’하겠다고 위협하는 마당에 우리도 국가안보를 위한 억제력으로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 강력한 것도 가질 수밖에 없지 않냐”고 반항적인 어투로 답했다고 켈리는 한·일 정부에 설명했다. 강석주의 발언을 고농축우라늄계획 인정으로 단정하기엔 모호하다고 여긴 한·일 정부는 ‘강석주-켈리 대화록’ 사본 공유를 요청했으나 부시 행정부는 거부했다. 그러곤 ‘북이 고농축우라늄계획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공식 발표(10일17일)를 밀어붙였다. “미국이 적대시정책을 버리면 미국의 안보 관심사의 해결이 가능하다”거나 “최고위층과의 회담을 통해 일괄타결을 희망한다”는 강석주의 제안은 못 들은 체했다.
북은 10월25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로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고 명백히 말해주었다”고 발표했다. “미국 특사는 아무런 근거자료도 없이”라는 담화의 지적처럼 켈리는 강석주한테 아무런 물증도 제시하지 않았으며, 강석주가 켈리한테 실제 한 말은 “우리는 핵프로그램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도 가지고 있다”(2004년 1월 평양을 방문한 존 루이스 스탠퍼드대 명예교수한테 김계관이 보여준 ‘강석주-켈리 대화록 한글본’)인데도 부시 행정부의 공식 발표를 정면으로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우호적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때 북이 의지하는 모호성이 충만한 ‘강 대 강 위기 고조 전략’이다.
부시 행정부는 11월13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른 미국의 핵심 의무 사항인 대북 중유 제공 중단을 결정하고, 다음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케도) 집행이사회에서 한·일 정부를 윽박질러 12월부터 공급 중단을 공식 결정했다. 그 순간 볼턴은 “해냈습니다. 신이시여 고맙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회고록 <항복은 선택지가 아니다>에 감격스레 적었다.
부시 행정부가 ‘제네바 기본합의’를 사실상 파기하자, 북은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8년간 유지한 영변 핵시설의 동결 조처를 빠르게 되돌렸다. 핵 동결 해제 및 핵시설 재가동 선언(12월12일)→영변 원자로 봉인 제거(12월21일)→사용후연료봉 저장시설 봉인 제거(12월22일)→재처리시설 봉인 제거(12월23일)→핵연료봉 공장 봉인 제거(12월24일)→국제원자력기구 사찰관 추방(12월31일), 그러곤 마침내 “국가의 최고이익이 극도로 위협당하고 있는 엄중한 사태에 대처해 자주권·생존권·존엄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의 비확산에 관한 조약(NPT)을 탈퇴한다고 선언하는 정부성명을 발표(2003년 1월10일)했다. 부시·네오콘이 ‘제네바 기본합의’ 체제를 부숴버리자, 판도라의 상자 틈새로 빠져나온 2차 핵위기가 한반도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이제훈 ㅣ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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