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에서 사상 첫 북·미 정상 회담 합의문인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6·12공동성명 전문의 “상호 신뢰 구축이 조선반도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문구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밝히는 나침반이자 등불이다. 북을 의심해 ‘비핵화 먼저’ 노선을 고수해온 역대 미 행정부와 달리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 신뢰 쌓기”로 비핵화와 관계정상화를 이루자고 확약했다는 뜻이어서다. 4·27판문점선언과 6·12 북미 공동성명으로 탈냉전·평화번영의 한반도·동북아를 이룰 설계도는 완성됐다. 남은 과제는 약속을 이행하는 실천이다.
이제훈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차례의 북한 핵실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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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뒤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 겸 국무위원장은 임박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려 동분서주했다. 김 위원장은 5월7~8일 중국 다롄에서 시진핑 중국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2차 정상회담을 했다. 시 주석과 베이징에서 처음 만난 지 40일 만이다.
5월9일엔 평양을 두 번째 찾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노동당 중앙위 본부청사에서 만나, 김동철·김상덕·김학송씨 등 북에 억류돼 있던 (한국계) 미국인 3명을 귀국길에 데려가라고 했다. 북미 정상회담에 부정적인 국내 여론을 이겨내라고 트럼프 대통령의 손에 쥐어준 선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10일 새벽 2시40분(현지시각)께부터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치러진 귀환행사에 직접 나왔고, “매우 기대되는 김정은과 나의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6월12일 개최될 것”이라는 트윗을 올렸다. 마침내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의 시간과 장소(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가 확정됐다.
북은 축포를 쏘아 올리듯 5월12일 ‘외무성 공보’로 “23~25일 사이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북부핵시험장 폐기”를 공식화했고, 5월24일 한국·미국·중국·영국·러시아 5개국 취재진이 현장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공화국 북부핵시험장을 완전히 폐기하는 의식”(5월25일 북 핵무기연구소 성명)을 진행했다. 조건을 달지 않은 ‘선제 비핵화 조처’다. 북미 정상회담 성공을 바라는 마중물이다. 다롄 북중 정상회담 직후 조선노동당의 시·도 당위원장 모두가 참여한 ‘친선참관단’이 중국을 찾았다. 박태성 단장은 5월16일 시진핑 주석을 만나 “중국의 경제 건설과 개혁·개방의 경험을 배우러왔다”고 밝혔다고 중국 <중앙텔레비전>(CCTV)이 보도했다. 이즈음 김정은 위원장은 노동당중앙군사위 7기1차 확대회의를 열어 “인민군대가 조국보위도 사회주의 건설도 다 맡자”는 구호를 채택했다. 4월20일 노동당 중앙위 7기3차 전원회의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제건설 총력 집중”이라는 새 전략노선에 따라 인민군을 건설 등 경제현장에 투입하겠다는 선언이다.
호사다마(좋은 일에는 탈도 많다)라고 했던가. 5월16일 “트럼프 행정부가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가 일방적인 핵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그러한 대화에 더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며 다가오는 조미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의 담화가 <조선중앙통신>으로 공표됐다. 5월24일엔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볼튼”과 “부통령 (마이크) 펜스”를 실명 비난하며 “미국이 우리의 선의를 모독하고 계속 불법무도하게 나오는 경우 조미수뇌회담을 재고려할 데 대한 문제를 최고지도부에 제기할 것”이라는 “외무성 최선희 부상 담화”가 발표됐다. 북·미 사이 물밑 협상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데 따른 공개 불만 표출이자 북한 특유의 판 흔들기다.
자칭 ‘거래의 달인’인 트럼프 대통령은 북보다 더한 벼랑끝전술로 응답했다. ‘최선희 담화’ 직후 트럼프는 “친애하는 (김정은)위원장”한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슬프게도, 당신들의 최근 담화가 보여준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 적대감을 볼 때, 나는 오랫동안 계획된 이 만남이 이번에는 부적절하다고 느낀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회담 취소 선언이다. 그러곤 “언젠가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한다”며 뒷문을 열어뒀다.
북은 ‘공갈 외교’를 바로 포기했다. 5월25일 “(김정은 위원장의) 위임에 따라” 김계관이 “우리는 아무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음을 미국 측에 다시금 밝힌다”는 담화를 <중통>으로 발표했다.
김 위원장은 ‘김계관 담화’만으로는 트럼프의 마음을 돌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일체의 형식 없이 만나고 싶다”며 문재인 대통령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남북 분단사에 전무후무할 ‘하루짜리, 사후 발표’ 정상회담(2018년 5월26일 판문점 통일각)이 그렇게 열렸다. 5월27일치 <노동신문>은 전날의 정상회담 소식을 담은 1~2면 펼침 기사에서 김 위원장이 “조미수뇌회담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문재인 대통령의 노고에 사의를 표”했다고 보도했다. ‘남조선은 끼지 말라’를 입에 달고 사는 북이 북·미 사이에 한국의 자리와 몫이 있음을, 요컨대 ‘남북미 3각관계’의 존재를 공개 인정한 역사적 증거 문헌이다.
‘통일각 남북 정상회담’ 다음날인 5월27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최선희 부상과 성김 주필리핀 미국대사가 비밀리에 만나 실무협상을 다시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1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만나 “우리는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북·미의 기싸움 속에 한때 ‘죽었던’ 북미 정상회담이 5·26 남북정상회담을 디딤돌 삼아 다시 살아난 것이다.
2018년 6월12일 오전 9시4분(현지시각)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 회담장 로비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김정은”과 “아메리카합중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서로 마주보며 걸어와 12초간 악수를 했다. ‘3년 전쟁’을 포함한 70년 적대를 뒤로 하고 평화·공존·번영을 찾아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트럼프)에 함께 나선 것이다. ‘냉전의 외딴 섬’에 갇힌 ‘분단된 두 코리아’를 탈냉전의 너른 바다로 이끌 결정적 도약대가 되리라는 기대를 안은 세기의 만남은 12초 악수→단독 정상회담(36분)→확대 정상회담(100분)→업무오찬(50분)→1분 산책→공동성명 서명식(6분)→트럼프 대통령 단독기자회견(65분) 순으로 5시간 가까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김 위원장은 이날 가슴에 담아둔 속내를 쏟아냈다. 단독회담 머리발언에선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기도 했는데 우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말했다. 확대회담 머리발언에선 “훌륭한 출발을 한 오늘을 기회로 해서 함께 거대한 사업을 시작해볼 결심은 서 있다”고 밝혔다. 미국이 상응조처만 취한다면 비핵화에 적극 나서겠다는 확언이다. 공동성명 서명식에선 “우리는 오늘 과거를 덮고 새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문건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미국과 세계를 향한 약속이자 기대의 표현이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사상 첫 북미 정상 합의문인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은 전문과 4개조로 이뤄져 있다. “새로운 조미 관계 수립”(1조)-“한반도에서 항구적·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공동 노력”(2조)-“판문점 선언 재확인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노력 확약”(3조)-“한국전 미군 유골 발굴·송환 확약”(4조)이 그것이다. 4조는 남북 사이 이산가족상봉 사업처럼 북미 사이 신뢰 쌓기의 마중물이다. 1·2·3조와 역사적 무게와 차원이 다른 북한의 “대미 서비스”다.
6·12공동성명의 북미관계 정상화(1조)+한반도평화체제(2조)+한반도비핵화(3조)에, 4·27판문점선언의 “일체의 적대행위 전면 중지”(2조1항)와 “단계적 군축 실현”(3조2항)을 더하면 ‘화해협력의 탈냉전 한반도·동북아’로 나아갈 ‘완벽한 설계도’가 된다. ‘한반도 냉전구조’의 4대 기둥인 △남북 불신·적대 △북미 적대 관계 △핵 등 대량파괴무기(WMD)를 포함한 군비 경쟁 △군사정전체제를 해소할 열쇠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냉전구조의 4대 기둥은 서로 얽혀 상호의존적이라 하나씩 따로 풀 수 없고 포괄적·단계적 접근이 불가피한데, 무엇보다 북미 적대 관계 해소가 핵심이다. 역사가 가르쳐준 바, 북미 적대관계의 완화·해소 노력이 동반되지 않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노력은 아무리 애써도 정상에 이르지 못하는 ‘시지프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하여 6·12공동성명 전문의 “상호 신뢰 구축이 조선반도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문구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밝히는 나침반이자 등불이다. 북을 의심해 ‘비핵화 먼저(선 비핵화)’ 노선을 고수해온 역대 미국 행정부와 달리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 신뢰 쌓기”로 비핵화와 관계정상화를 이루자고 확약했다는 뜻이어서다. 4·27판문점선언과 6·12 북미 공동성명으로 탈냉전·평화번영의 한반도·동북아를 이룰 설계도는 완성됐다. 남은 과제는 약속을 이행하는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