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리덩후이 대만 총통이 모교인 코넬대 연설을 이유로 미국을 방문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리 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으려 했지만, 미국 상·하원이 비자 발급을 요구하는 결의를 찬성 396 대 반대 0표로 통과시키며 행정부를 압박했다. 리덩후이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뒤 중국 인민해방군은 7월부터 타이완 인근 해역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해병대 상륙 훈련을 실시하는 등 대규모 군사적 보복에 나섰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에 대응해 항공모함 니미츠호와 인디펜던스호가 이끄는 거대 항모전단을 대만해협에 파견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동아시아에 배치한 최대 규모의 병력이었다. 1996년 3월 대만 총통 선거를 앞두고 중국군은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탄도미사일을 대만과 가까운 해역에 발사하는 등 ‘북풍’으로 위협했다. 대만 여론의 역풍이 불었다. 리덩후이는 압도적 득표로 승리했다. 1997년에는 뉴트 깅리치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해 리덩후이 총통과 만났다.
‘3차 대만해협 위기’로 불리는 이 상황은 미중관계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1955년과 1958년 중국군이 대만 금문도에 대규모 폭격을 퍼부으면서 시작된 1·2차 대만해협 위기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은 1979년 수교 이후 소련에 맞서는 준동맹 상태로 긴밀해졌다가, 1989년 중국군의 천안문(톈안먼) 시위 무력 진압과 1991년 소련 붕괴로 멀어지기 시작했고, 1995~96년 대만해협 위기로 불신이 깊어졌다. 중국 지도부와 군은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에 결국 뒤로 물러섰지만, 절치부심하면서 미국에 비해 열세인 해군력을 보완할 준비를 시작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잠수함 함대 건설, 기뢰 축적, 미국 항공모함을 위협할 수 있는 대함탄도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대만해협에 미국의 군사력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잠수함과 미사일과 기뢰로 ‘만리장성’을 쌓았다.
27년이 흐른 지금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군사력은 미국을 넘어섰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만과의 통일을 실현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겠다는 약속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통치정당성의 핵심이며, 몇달 뒤 열릴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시 주석이 장기집권의 길로 들어서는 중요한 명분이다.
이토록 민감한 시기에 미국 권력 서열 3위 펠로시 하원의장이 대만 방문 여부에 대해서는 확답을 하지 않은 채 30일(현지시각) 아시아로 출발했다. 하원의원이 된 지 얼마 안된 1991년 베이징 방문 당시 천안문 광장에서 천안문 시위 희생자들을 기리는 펼침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던 펠로시 의장은 ‘대만 지지’라는 정치적 유산을 남기려 한다. 방문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펠로시 의장이 실제로 대만을 방문한다면, 대만 문제에 대해 “불장난하면 반드시 불에 타 죽는다”고 경고했던 시진핑 주석과 중국군의 대응은 격렬할 것이다. 중국군은 ‘3차 대만해협’ 위기 당시 미국에게 당했던 치욕을 설욕할 기회로 여길 수도 있다. 대만해협에서 중국의 군사적 위협은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전개될 것이다. 훗날 역사가 ‘모두가 어리석게 전쟁을 향해 걸어간 시기’로 지금을 기록할까 우려스럽다.
박민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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