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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내가 틀렸다” 말할 수 있으려면 [권태호의 저널리즘책무실]

등록 2022-08-03 18:46수정 2022-08-03 22:55

<뉴욕타임스>의 ’I was wrong’ 기획 칼럼 초기 화면.
<뉴욕타임스>의 ’I was wrong’ 기획 칼럼 초기 화면.

권태호ㅣ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짧은 시간에 같은 소재로 두번이나 칼럼을 쓴다는 건 게으르고 겸연쩍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유레카’에 이어 또 한번 <뉴욕 타임스>의 “내가 틀렸다”(I was wrong about…) ‘정정 칼럼’을 언급해본다.

지난달 21일(현지시각) 뉴욕 타임스가 이런 제목 아래 폴 크루그먼, 토머스 프리드먼 등 뉴욕 타임스 대표 칼럼니스트들의 정정 칼럼 8개를 게시했다. 과거 자신들이 쓴 칼럼의 오류를 고백하고, 견해를 수정한 것이다. “역시 뉴욕 타임스”라며 또 찬사를 받았다. 크루그먼은 1년 전에 이처럼 가파른 물가 상승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프리드먼은 중국의 개방이 20년 전 자신의 예상만큼 빠르지 않다는 것이고, 파하드 만주는 13년 전에 페이스북이 가져올 폐해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들이다. 이런 고백에 용기가 필요할까? 이 칼럼니스트들의 당시 판단은 지금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전혀 도덕적 잘못이 아니며, 지적 나태라 할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정정 칼럼들의 분위기도 차분하고 담담하다. 통렬한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8개 칼럼 중 그나마 ‘용기’가 필요한 칼럼으로 꼽을 수 있는 건, 10년 전 주변 여성들을 성추행했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나오자 사퇴한 앨 프랭컨 민주당 상원의원 사건에 대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즉각 사퇴’를 주장했던 것이 잘못이었다”는 미셸 골드버그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을 향해 “당신들이 아직도 트럼프가 끔찍하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면, 당신들이 끔찍한 것”이라는 독설을 내뱉은 것에 대해, “엘리트들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브렛 스티븐스의 반성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뉴욕 타임스는 161년 전 기사도 수정했다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2014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노예 12년>이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을 받으면서, 옛날 뉴욕 타임스 기사가 회자되자, 1853년 그 기사에서 노예 ‘솔로몬 노섭(Northup)’의 이름을 ‘노스럽’(Northrup, Northrop)으로 잘못 표기했다고 정정 기사를 냈다. 이런 정정에 용기가 필요할까? 용기란, 위험과 비난이 닥쳐올지도 모르지만 옳기 때문에 이를 감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용기를 감싸는 겉옷이 된다.

언론이 단순 사실 오류가 아닌 견해에 대한 오류를 저질렀을 때, 이를 바로잡으려면 몇 가지 선행 조건이 필요해 보인다. 먼저, 자신과 조직 내부가 오류인지 인지할 수 있는 구조로 형성돼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다른 견해에 열려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사실의 바탕 위에 의견을 쌓아야 한다. 사실이 달라지면 의견도 영향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조직의 사고가 동질화(homogenization)되지 말아야 한다. 두번째, 조직은 고의가 아니라면 오류에 너그러워야 한다. 만일 “내가 (그때) 틀렸다”고 한 칼럼니스트들에게 “그러니 이제 당신은 아웃”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가 오류를 선뜻 인정할 수 있을까. 다만,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건 조직 내부에서 ‘왜 오류가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스스로 캐묻는 것이다. 그래야 같은 오류가 재발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린 종종 잘못에 매섭되, 캐묻지 않고 일단 덮어버릴 때가 많다.

외부 조건도 필요하다. ‘내가 틀렸다’라는 유레카 칼럼에 아래와 같은 댓글이 각각 달렸다. “한겨레는 조국 사태 때 조국 옹호하고, 검수완박을 계속 옹호하고 지지해온 것들이 아직도 옳은 일이였(었)다고 믿고 있나요?”, “한겨레는 결코 조국을 옹호한 적이 없지요?! 오히려 조중동에 앞서 선발대처럼 조국을 죽였지요.” 두 댓글러들이 한겨레 기사를 얼마나 봤는지 알 수 없고, 한겨레 기사가 널뛰기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견해에 앞서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이 이처럼 전혀 딴판일 때, 고민은 다층화된다. 그렇다고 언론사 안에 있는 사람이 독자를 탓하는 건 비겁한 일이다. 뉴욕 타임스가 정정 칼럼 서문에 “양극단으로 갈라진 현시대에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는데, 한국에선 그 정도가 더 심해 보인다. 정정은 ‘지적 토론’을 위한 출발점이어야 한다.

정정을 위한 내·외부 조건은 결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론은 스스로 품질을 높여야 하고, 기꺼이 정정하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쌓이면 자신감도, 품격도 배어날 수 있다. 아울러 사실에 대한 정정은 서두르되, 견해에 대한 정정은 좀더 보폭을 길게 잡는 것도 경박스러워 보이지 않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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