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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선균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남긴 질문

등록 2024-01-17 17:36

수사기관의 ‘의심’에 불과한 수사 내용이 여과 없이 언론에 보도되고, 공개 소환과 포토라인 세우기 등으로 공공연하게 ‘유죄의 낙인’을 찍었다는 점에서 이선균씨 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은 ‘닮은꼴’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23일 배우 이선균씨가 마약 혐의와 관련해 3차 조사를 받기 위해 인천경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종규의 저널리즘책무실] 이종규│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당신들은 아픈 역사의 값비싼 교훈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회하거나 성찰하지도 않았고, 마치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것처럼 여전히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2일 인권연대와 더불어민주당 인권위원회 주최로 열린 ‘검경 수사 중 피조사자 자살 원인 및 대책’ 토론회에서 발표된 김희수 변호사의 토론문 가운데 일부다. ‘당신들’은 수사기관과 언론을 말한다. 검사 출신인 김 변호사는 배우 이선균씨 사망 사건을 경찰과 언론이 공모한 ‘사회적 타살’로 규정했다. 경찰과 언론이 공동으로 이씨를 악마화하고 망신주기와 모욕주기를 거듭해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고발장을 쓴다는 마음으로 토론문을 썼다고 했다.

‘수사기관이 흘리고 언론이 받아쓰는’ 관행은 유력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이들에 대한 수사가 이뤄질 때마다 늘 지탄의 대상이 됐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과정에서 나온 ‘논두렁 시계’ 보도가 단적인 예다. 수사기관의 ‘의심’에 불과한 수사 내용이 여과 없이 언론에 보도되고, 공개 소환과 포토라인 세우기 등으로 공공연하게 ‘유죄의 낙인’을 찍었다는 점에서 이선균씨 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은 ‘닮은꼴’이라 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수사를 받다 숨진 뒤 법무부는 2010년 ‘기소 전 혐의사실 공개 금지’ 원칙을 뼈대로 하는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을 만들었다. 경찰청도 2014년 비슷한 취지의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선균씨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반인권적 수사·보도 관행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연예인 관련 사건에서는 관음증에 가까운 행태가 아무렇지 않게 되풀이된다. 연예인은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직업이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연예인 사건의 경우, 수사 대상자는 일단 엄청난 보도량에 주눅 들기 십상이다. 한 언론이 ‘단독’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기사를 내보내면 순식간에 수십, 수백건의 기사가 복제되어 퍼져나간다. 보도 내용이 사실인지, 보도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언론의 범죄수사 보도 가운데 상당수는 수사기관만이 알고 있을 개연성이 높은 ‘피의사실’이다. 형법은 수사기관이 기소 전에 피의사실을 공표하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 ‘무죄 추정의 원칙’이 규정돼 있다는 점에 비춰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수사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피의사실은 어떻게든 피의자를 옭아매려 하는 수사기관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일방적인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사건 관련자의 ‘오염된’ 진술일 수도 있다. 이런 내용이 언론에 무차별적으로 보도된다면 대중에게 유죄의 예단을 심어줄 수밖에 없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껏 피의사실 공표죄로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사실상 사문화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수사기관이 공식 브리핑 등을 통해 대놓고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익명의 ‘관계자’발로 특정 언론에 수사 내용이 ‘유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취재원이 드러나지 않으니 누구도 책임질 일이 없다. 그렇다고 유출자를 찾겠다며 기자를 조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장 언론 자유 침해 논란이 불거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사기관의 범죄를 수사기관이 적극적으로 수사할 리도 만무하다.

국민의 알권리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수사 사안이 공적 관심사에 해당한다면 마냥 깜깜이로 수사를 진행하기는 어렵다. 언론사들도 피의사실 공표 논란이 있을 때마다 ‘알권리’를 내세워 반박하곤 한다. 법무부와 경찰청이 내부 훈령 등을 통해 피의사실 공표 금지의 ‘예외 규정’을 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알권리는 보도 내용이 공익적 가치가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이선균씨의 경우 정치인과 같은 공적 인물도 아닐뿐더러, 많은 언론이 까발린 그의 사생활이 어떤 공적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알권리가 인격권이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보다 상위에 있다고 볼 이유도 없다.

봉준호 감독 등 문화예술인들은 지난 12일 성명서를 내어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만일 그동안 그래왔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사건이 잊힌다면 제2, 제3의 이선균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제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수사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피의사실을 흘리는 행위가 정당한가. 혹시 얄팍한 호기심을 알권리로 포장해온 건 아닌가. 효율적인 수사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라면 인격권은 유보되어도 될 만큼 사소한 것인가.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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