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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호기심이 줄어들 때

등록 2022-08-03 19:28수정 2022-08-04 02:39

중국 오성홍기가 나부끼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중국 오성홍기가 나부끼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읽기]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다음 학기 중국 사회에 관한 수업계획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머리가 텅 빈 느낌이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대부분의 학생들은 중국에 가본 적이 없고, 한국이 젊은 세대의 반중 정서가 가장 심하다는 통계는 자기예언적 수행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패권에 눈먼 중국을 비판하는 학술논문은 학생들한테 어떻게 읽힐까? ‘중국이 중국했네’의 고급 버전으로 비치는 건 아닐까?

해당 지역에서 평범한 대중과 섞이며 현지조사를 해온 인류학자들은 중국의 ‘제로 코로나’ 조치가 장기화하고 시진핑 체제 이후 정치적 검열이 심해지면서 연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 정부가 모국어로 쓰이지 않은 연구결과물을 두고도 간섭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니 내가 인터뷰한 현지인들한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에 글쓰기를 망설이게 된다. 서구 학계에서도 중국 현지조사는 인맥을 활용하기 쉬운 자국 출신 유학생들이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다. 인공지능 섹터에 고용된 장애인 노동자부터 부동산이 가장 싼 지역을 골라 게으를 자유를 좇는 청년까지 연구 참여자들 면면이 흥미롭다.

출로가 막혔을 때 연구 욕심이 더 간절해지는 법일까. 중국이 개혁개방에 착수하고 냉전체제가 동요하던 1980년대 초,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활동하며 미-중 관계 정상화에 깊이 관여한 정치학자 미셸 옥센버그는 학술연구를 위해 농촌 한곳을 내달라고 덩샤오핑한테 요청했다. 인구 60만의 산둥성 쩌우핑현이 낙점됐다. 삼십년 동안 인류학, 정치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 연구자들이 쩌우핑현 정부에서 마련해준 주택에 머물며 가족, 여성의 지위, 재산권, 토지, 축산업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했고, 지역의 변화를 보러 학생들과 다시 방문했다. 이 연구기지가 너무나 소중해 옥센버그는 현지 책임자 스창샹이 골초란 점까지 걱정했다. 스창샹이 그보다 14년 더 살았지만.

하지만 중국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중국 땅을 밟아야 할까? 인류학자 크리스 바산트쿠마르는 냉전 시기 중국에 접근하지 못한 탓에 대만, 홍콩, 화교 집단을 중심으로 현지조사가 이뤄진 역사를 마을 중심의 고전적 연구나 국가 단위에 기반한 전통적 접근을 재고하는 계기로 해석했다.

‘중국’은 사실 어디에나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길목에서 폭염에 아스팔트를 깔고 있는 기사도 중국 사람이고, 이 칼럼을 쓰기 위해 만지는 키보드도 중국인, 중국 부품과의 연결을 통해 완성됐다. 스창샹의 과거 인터뷰는 방금 중국 웹사이트에서 찾았다. 같은 국적이라도 프로게이머, 특파원, 불법체류자의 삶에서 등장하는 ‘중국’이 모두 같을 리 없고, 오늘 등장한 ‘중국’이 내일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대상들이 그것들을 조작하는 실천과 함께 출현하기도 사라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중국이란 실재는 존재론적으로 일종의 다양체(multiple)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중국을 논할 때 시진핑, 코로나, 대만, 경제 같은 주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면, 이 주제를 중심으로 엮인 지식생산자들의 동맹이 그만큼 견고하기 때문일 테다. 다른 중국을 출현시키고 싶다면 다른 배치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쩌우핑을 중국의 ‘소우주’로 취급한 미국 학자들의 연구 경향은 고루해 보인다. 현지 주민의 동의 없이 지역을 실험실로 만든 과정도 찝찝하다. 하지만 쩌우핑을 매개로 만났던 교수, 학생, 관료, 농민들의 회고담을 보면서 나는 이들이 서로에 대해 품었던 호의와 호기심이 부러웠다. 문화대혁명의 상흔이 여전히 깊던 시기라 입을 열기 조심스러웠지만, 농민들은 적국의 연구자들과 곧잘 어울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의 자잘한 소문까지 공유했다. 연구자들은 쩌우핑에서 맺은 인연에 깊이 감사했고, 부고를 나눌 때마다 안타까워했다.

요새 나는 아무래도 이 호기심이 줄어든 것 같다. 40여년 전과 달리 중국 이야기는 어디서든 넘치지만, 지식생산자들 사이에서 중국에 관한 정보나 관점이 특정한 형태로 격리되는 현상은 더 심해졌다. 중국이 인격화된 단수로 등장하고, 친중-반중을 중심으로 논쟁이 공회전하다 보니 한때 우려했던 ‘기괴한’ 중국, ‘위험한’ 중국의 공론장에 ‘지겨운’ 중국까지 틈입한 모양새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사건들에 대한 비판이 생명력을 가지려면 중국을 알고 싶은 욕구부터 점검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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