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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스스로 놀거리를 찾고 맘껏 뛰노는 곳

등록 2022-08-07 17:58수정 2022-09-25 19:58

전주 ‘야호 맘껏 숲놀이터’. 스스로 놀거리를 찾고, 노는 방법을 궁리한다. 일상건축사사무소 제공
전주 ‘야호 맘껏 숲놀이터’. 스스로 놀거리를 찾고, 노는 방법을 궁리한다. 일상건축사사무소 제공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전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여행과 답사의 경계가 늘 불분명하다. 동행자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전주의 대명사인 한옥마을과 요즘 뜨는 문화 플랫폼 팔복예술공장에 들렀고 비빔밥과 콩나물국밥도 맛봤지만, 잠깐의 틈을 포착해 점찍어둔 장소를 둘러보는 데 성공했다. 덕진공원 어귀에 새로 생긴 ‘야호 맘껏 숲놀이터’다.

야호, 맘껏! 이름만 들어도 신나는 이 놀이터는 유니세프의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받은 전주시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와 함께 비용을 마련해 만들었다. 어린이에게 스스로 도시 공간을 만들 권리를 준다는 취지의 유니세프 프로젝트가 서울의 ‘맘껏놀이터’, 군산의 ‘맘껏광장’에 이어 전주의 맘껏 숲놀이터로 확산한 것이다. 세 사업의 기획과 조성 과정을 이끈 조경가 김아연 서울시립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놀이 공간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 같아야 합니다. 뻔한 조합놀이대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정해진 규칙대로만 놀고 사고해요. 그래서 놀이터를 재미없다고 여기죠. 스스로 놀거리를 찾고, 노는 방법을 궁리하게 했어요.”

전주 맘껏 숲놀이터에는 넓은 공터가 있다. 여느 아파트단지 놀이터나 동네 어린이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성품 놀이기구는 없다. 그네와 시소도 없다. 대신 다양한 높낮이의 잔디 언덕이 공터를 감싸고 있고, 얕은 개울과 물웅덩이, 흙과 모래, 낮고 길쭉한 곡선형 벤치, 풍성한 수목이 흩어져 있다. 내가 방문한 날에는 진흙 놀이와 나무토막 쌓기에 열중한 아이들로 북적였다. 큰 아이들은 쉬지 않고 언덕을 오르고 뛰어내렸다.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한 초등학생들은 한여름 무더위에 흠뻑 땀 흘리며 어설픈 낫질로 풀을 베고 있었다. 어른 눈에는 놀이기구 없는 놀이터가 재미없어 보이지만, 아이들은 뭘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할지 스스로 탐색하며 즐겁게 논다. 자발성의 힘이다.

풀 베기 자원봉사에 나선 아이들. 그 뒤로 다목적 슬라이딩 가벽이 보인다. 사진 배정한
풀 베기 자원봉사에 나선 아이들. 그 뒤로 다목적 슬라이딩 가벽이 보인다. 사진 배정한

맘껏 숲놀이터의 또다른 특징은 다양한 연령층에 대한 배려다. 어린이뿐 아니라 청소년도 공유하는 다용도 공간이 곳곳에 있다. 언덕 능선을 넘어서면 덕진공원의 아름다운 호수 풍경을 액자처럼 담아내는 슬라이딩 가벽이 나온다. 가벽에 달린 넓은 칠판은 분필 낙서로 빼곡하고, 대형 거울은 케이팝 가수들 춤을 연습하는 도구로 쓰인다. 놀이터 경계부의 대나무숲에는 야호학교 청소년들이 직접 디자인해 제작한 아지트가 있고, 개잎갈나무숲에는 모두의 로망인 트리하우스가 여러 채 매달려 있다. 풍성한 숲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자연과 만나는 곳 그 이상이다. 시민들이 여백의 시간을 호젓하게 보내는 장소다. 바로 붙어 있는 덕진호수는 연꽃 관광객으로 시끌벅적하지만, 놀이터의 숲은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의 정원이다.

이렇게 자발성과 다양성을 갖춘 놀이터를 묵묵히 지원하는 조연이 있다. 입구 쪽에 자리한 ‘맘껏하우스’다. 기획자 김아연은 서울과 군산의 맘껏 프로젝트 경험을 통해 실내 공간과 연계되지 않으면 야외 놀이터가 활성화하기 어렵다는 걸 절감했다고 한다. 날씨와 상관없이 아이들이 놀고 보호자가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전주시가 수용했고, 지역 건축가 김헌(일상건축사사무소)의 손을 거쳐 공간에 다양한 틈을 만들어내는 검박한 박공지붕 건물이 들어섰다. 실내지만 야외처럼 느껴지는 사이 공간이 많아 일종의 놀이기구처럼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시간의 겹이 포개진 안온한 장소감도 이 땅의 숨은 매력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73년부터 거의 30년간 운영된 덕진공원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전주에서 하나뿐인 야외 수영장이라 여름철이면 많은 어린이가 몰려와 물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게다가 덕진공원은 오랜 세월 동안 전주 유일의 도시 유원지 구실을 해온 명소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덕진호의 연화교를 거닐고 오리배를 타며 데이트하던 곳, 엄마 아빠가 물장난치며 무더위를 이겨내던 곳에서 이제 아이들이 맘껏 뛰놀며 자연을 만나고 시간을 달린다.

여러 세대에 걸친 기억이 켜켜이 쌓인 땅, 스쳐 지나가는 구경꾼에게는 추상적인 공간이지만 전주 사람들에게는 사건과 이야기가 층층이 새겨진 장소다. 인문지리학자이자 환경미학자인 이푸 투안이 말하듯, 공간은 경험을 통해 장소가 된다. 맘껏 숲놀이터에 깊이 밴 장소감을 투안 식으로 말하자면 ‘토포필리아’(topophilia), 곧 사람이 장소와 맺는 정서적 유대다.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에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를 붙인 조어 토포필리아는 새로 시작하는 이 지면의 이름이기도 하다.

‘맘껏 숲놀이터’의 풍성한 숲은 자연을 만나는 비밀의 정원이다. 사진 김아연
‘맘껏 숲놀이터’의 풍성한 숲은 자연을 만나는 비밀의 정원이다. 사진 김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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