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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걸어야 하는 도시, 오슬로의 기억

등록 2023-12-10 18:29수정 2023-12-11 02:38

빙산이 육지에 얹힌 형상의 오슬로 오페라하우스. 경사 지붕은 도시 보행로의 연장이다. 스뇌헤타 제공
빙산이 육지에 얹힌 형상의 오슬로 오페라하우스. 경사 지붕은 도시 보행로의 연장이다. 스뇌헤타 제공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좁은 공부방을 어수선하게 하는 주범이긴 하지만, 공감한 전시회의 소형 포스터, 기억에 남는 여행지의 엽서, 오래전 제자가 보내온 손글씨 카드 같은 소품을 책장에 세워두곤 한다. 산만한 방 풍경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 날이 오면 한 번씩 소탕에 나서지만, 그래도 살아남는 자들이 있다. 모니터 옆 책꽂이 선반을 4년 넘게 지키고 있는 건 빙하가 남긴 피오르의 도시, 노르웨이 오슬로의 오페라하우스 사진엽서다. 빙산을 닮은 하얀 건물에 눈까지 덮인 사진 속 풍경을 보면 잠시 머물렀던 도시의 기억이 살아난다.

첫 만남은 설레지만 어설프기 마련이다. 도시도 그렇다. 다시 만나면 마음이 열린다. 처음엔 보이지 않던 것들에 눈이 간다. 뭉크의 도시 오슬로도 그랬다. 매일 우중충한 비가 내려 뭉크의 ‘절규’보다 더 우울했던 첫 방문 때와 달리, 두 번째 여행에서 만난 오슬로는 맑은 공기, 깨끗한 바다, 아름다운 언덕이 절묘한 비율로 혼합된, 녹색 도시 그 자체였다. 걷기 좋은 도시를 넘어, 걸어야 하는 도시. 이유 없이 유럽의 환경 수도로 등극한 게 아니었다.

오슬로시는 구도심 비외르비카 지역의 낙후한 항만을 활기차게 재생하는 ‘피오르 시티’ 계획을 펼쳤는데, 문화예술 인프라 구축의 촉매제 역할이 오페라하우스에 맡겨졌다. 해변을 따라 산책하며 멀리서 보거나 배를 타고 뭍으로 다가가면서 보면, 오페라하우스의 형태가 바다에 떠다니는 거대한 빙산이 육지에 얹혀 포개진 모습이라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오슬로에 기반을 둔 글로벌 디자인 그룹 스뇌헤타의 설계로, 순백의 대리석과 화강석 판을 힘찬 수평선과 사선으로 엮어 노르웨이 대자연의 아이콘인 빙산의 형상을 재현했다.

경사 지붕은 누구에게나 열린, 모두를 환대하는 공원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경사 지붕은 누구에게나 열린, 모두를 환대하는 공원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직관적인 형태 재현보다 더 특색 있는 건 완만한 경사의 외부 공간이 아래로는 바다로, 위로는 건물 지붕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다. 주변 가로에서 바로 연결되는 넓고 긴 경사면을 따라 걸으면 누구나 건물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다. 유모차 끌고 나온 어느 젊은 아빠를 뒤따르니 순식간에 오페라하우스 정상이 나왔다. 낭만적인 도심 경관과 숭고한 피오르 풍경을 한눈에 품고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오슬로의 장엄한 석양을 마음속에 눌러 담았다. 이런 연속적 경험의 동선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0년 개봉작 ‘테넷’을 보면 된다. 두 주인공이 비행기 사고에 관해 대화하는 장면을 찍은 곳이 바로 이 경사면이다.

경사 지붕이 곧 공원이다. 시민과 관광객 모두를 환대하는 공원. 정장 차려 입고 오페라나 발레 공연을 관람할 때만 이곳에 가는 게 아니다. 도심 해안가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면 마치 동네 뒷산 가듯 공연장 머리 위에 오를 수 있다. 오페라하우스 바깥에서 야외 대중음악 공연이 수시로 열린다. 경사면 지붕 공원은 자연스레 관객석으로 변신한다. 2012년 노르웨이의 한 텔레비전 쇼에 출연한 저스틴 비버가 다음 날 오페라하우스 지붕에서 무료 콘서트를 열겠다고 깜짝 발표해 수만 명 팬이 운집한 적도 있다.

중앙도서관의 특이한 형태는 오페라하우스를 가리지 않기 위한 것. 오슬로는 맥락과 관계를 존중하는 도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중앙도서관의 특이한 형태는 오페라하우스를 가리지 않기 위한 것. 오슬로는 맥락과 관계를 존중하는 도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2008년에 개장한 오페라하우스는 ‘걷는 도시’ 철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에 시작된 오슬로의 친환경 도시 정책은 그 어느 도시보다 급진적이다. 녹색당과 노동당, 사회당 정치 연합이 시의회 다수당이 된 2015년에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의 5% 수준으로 감축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실천 전략의 핵심은 2019년까지 도심 1.9㎢ 구역에서 자동차 운행을 금지하는 것. ‘차 없는 도심’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도심에서 주차장을 추방하는 데는 성공했다. 2025년부터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승용차 판매가 전면 금지된다. 중앙역에서 왕궁에 이르는 카를 요한스 거리는 길이 1.5㎞의 보행자 전용도로로 변모했다. 계속 걷다 보면 항구의 창고 지역을 재생한 아케르 브뤼게가 나오고, 반대편으로 걸으면 오페라하우스와 중앙도서관, 새 뭉크 미술관이 모인 피오르 시티 문화예술지구에 다다른다.

걷지 않으면 목적지로 갈 방법이 마땅치 않다. 오페라와 발레를 보러 걸어서 간다. 아니, 걸어가야 한다. 오슬로 오페라하우스는 걷는 길의 연장이다. 걷는 도시의 완성인 셈이다. 노르웨이의 상징인 빙산을 형상화했지만, 독자적으로 존재감 과시하는 랜드마크 건축이 아니다. 걷는 도시의 맥락을 존중하고 관계를 살피는 공원이다. 요즘 서울시가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노들섬과 여의도에 쏟아내고 있는 사업들과 출발점부터 다르다.

동네 뒷산 가듯 공연장 머리 위에 오를 수 있다. 사진 배정한
동네 뒷산 가듯 공연장 머리 위에 오를 수 있다. 사진 배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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