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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잡초나 뜯어 먹어라

등록 2022-08-15 18:08수정 2022-08-16 16:02

채식에 관한 현역 육군 대위의 <한겨레21> 기고 글에 달린 댓글 갈무리.
채식에 관한 현역 육군 대위의 <한겨레21> 기고 글에 달린 댓글 갈무리.

[숨&결] 방혜린 |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사관학교에서의 4년을 버티게 한 것은 여러가지겠지만, 역시 밥이 아닐까 한다. 학교에서의 밥 생각을 하자면 떠오르는 광경이 하나 있다. 우리 학교는 내가 신입생이 된 2008년부터 카자흐스탄에서 첫 외국군 수탁생도를 받았다. 가끔 우리와 월드컵 예선이나 아시안컵 축구 경기에서 마주치는 국가다. 우리는 카자흐스탄에 대해 딱 그만큼 알았다. 그 나라의 인종 구성도, 역사도, 문화도 모른 채 중앙아시아에서 온 생도를 환영해야 했다. 모든 것이 서툴렀고, 서투름을 넘어 무례했을 것이다.

카자흐스탄은 인구 70% 정도가 이슬람을 믿는다. 당연히 수탁생도 중에도 무슬림이 있었다. 우리는 카자흐스탄과 그곳에서 온 생도들을 이해하려 하는 대신, 막무가내로 그가 한국군 생도와 똑같이 생활하기를 강요했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그 생도는 생도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음식마다 숨어 있는 돼지고기와 전쟁을 벌여야 했고, 선배 생도들은 그에게 돼지고기를 오리고기라고 속이거나 식판을 다 비우지 않으면 절대 식당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골렸다. 영내 생활을 하며 학업과 훈련을 병행해야 하는 사관학교에서 끼니가 얼마나 중요한데, 어느 날 그의 식판에는 밥과 포장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그들이 과연 학교 지휘부에 불편함을 호소했을까? 무사히 졸업해 고국에서 군 핵심 장교로 복무해야 할 ‘국가대표’ 생도 신분이었던 그들이 한국인 상급자들에게 서툰 한국어로 문화 차이에 관한 이해와 개선을 요청했을 리 만무했다. 참고, 버텨야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을 것이다. 결국 그 수탁생도는 원활한 생도 생활을 위해 돼지고기를 포함한 모든 것과 타협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돼지고기 먹는 걸 포함해 한국 문화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던 생도도 있었다. 나와 동기였던 수탁생도는 졸업해 고국으로 돌아가면 삼겹살이 제일 먼저 생각날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다른 후배 카자흐스탄 수탁생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무슨 마음으로 버텨낸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문득 학교생활을 떠올리면서, 카자흐스탄 생도들이 생존을 위해 많은 것과 타협하기 전에, 선배 생도들이 지도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골리기 전에, 지휘부가 나서서 수탁생도들의 모국에 대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학교 구성원들에게 충분히 교육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나라도 그렇게 나섰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뒤늦게 후회만 곱씹는다.

며칠 전 <한겨레 21>에 한 현역 육군 대위가 채식에 관해 기고한 글을 보았다. 군은 2021년에 이르러서야 장병들의 채식선택권 등을 보장할 수 있는 급식 지원정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기메뉴를 부대 자체 급양비에 맞춰 두부, 두유 등으로 대체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 이마저도 기고에 언급된 것처럼 채식 준비를 위해 잉여노동을 해야 하는 조리병의 ‘배려’와 ‘선처’에 의존해 이뤄지고 있다. 글쓴이는 채식을 이유로 군인으로서 정체성까지 흔들리거나 위축되지 않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글을 마쳤지만, ‘적탄이 쏟아지는데 밥투정 철부지를 챙겨야 하나’라는 원색적인 비방 댓글이 달렸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쯤 타인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게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타국에서 온 생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채식을 선택한 장병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 이런 것이 언제쯤 이기적인 행동 혹은 독특한 취향 따위로 치부되지 않을 수 있을까. 기고 글의 댓글 가운데 ‘채식주의자들은 군대에서 잡초나 뜯어 먹어라 ㅋㅋㅋ’라는 글도 있었다. 댓글 추천 수가 11개나 눌러져 있다. 잡초나 뜯어 먹으라는 비아냥 속에서, 10년 전 밥과 김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던 카자흐스탄 수탁생도의 식판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한국 사회의 오늘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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