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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정인 칼럼] 77년 전의 나가사키가 묻는다

등록 2022-08-21 18:07수정 2022-08-22 02:40

핵 억지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핵확산을 방지하고 핵무기를 감축하자는 일본 정부, 핵무기 폐기만이 살길이라고 강조하며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와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주장하는 나가사키 지방정부와 시민사회단체. 이들은 각각 오늘날 일본이 핵문제에 관해 가진 두개의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일 유엔본부에서 개막한 핵확산금지조약 제10차 검토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유엔본부/AFP 연합뉴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일 유엔본부에서 개막한 핵확산금지조약 제10차 검토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유엔본부/AFP 연합뉴스

문정인 | 세종연구소 이사장

1945년 8월9일 오전 11시2분, 미군 B-29 폭격기가 나가사키 도심 상공에 ‘팻 맨’을 투하했다. 21킬로톤 위력의 원자탄이 내뿜은 섬광과 후폭풍은 순식간에 도시를 초토화했고 민간인 7만4천여명이 희생됐다. 그중에는 1만여명으로 추정되는 한국인들도 있었다. 원래 팻 맨은 기타큐슈지역 고쿠라에 투하하기로 예정돼 있었지만, 구름으로 시계가 가려지자 마지막 순간에 투하 지점이 변경됐다.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지난 9일 필자는 나가사키 원폭 투하 77주년 위령 평화기원 추도식에 참석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필두로 피폭자와 그 가족을 포함해 모두 1600여명이 함께한 자리였다. 이날 행사에는 다양한 논점이 시선을 끌었다. 그 하나는 “나가사키 원폭이 인류 최후의 원폭이 돼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러시아를 외교사절 초청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주최 쪽 공식 발표도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 가장 주목할만했던 부분은 핵문제를 둘러싼 일본 정부와 나가사키 지방정부 사이의 노선 차이였다.

기시다 총리는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거론하며 핵 억지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핵무기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일본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다할 것을 천명했다. 이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겠다”는 1967년 ‘비핵 3원칙’을 고수할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적극적인 핵확산금지조약(NPT) 참여를 통해 핵 투명성의 제고, 핵무기 감축, 핵확산 방지 노력에도 선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핵무기 보유에 반대하고 핵확산 방지에 적극적으로 나서겠지만 미국과의 확장억지 전략은 필수적이라는 게 요지였다.

주최 쪽 인사인 다우에 도미히사 나가사키 시장은 이날 채택한 ‘나가사키 평화선언'에서 사뭇 결이 다른 견해를 밝혔다. 2022년 8월8일 현재 19만2310명의 나가사키 시민이 핵무기로 희생됐다고 공표한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드러났듯 “핵무기의 사용은 근거 없는 공포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적 위기”라고 진단했다. “핵무기 폐기만이 지구와 인류를 보호하는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라 못박은 다우에 시장은 “피폭국으로서 일본 정부는 핵 억지력이 아니라 핵무기의 완전한 폐기를 통해서 평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거부해왔던 핵무기금지조약(TPNW)을 즉각 서명, 비준해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다우에 시장은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 구상도 공식 제안했다. 동북아지역 공식 핵보유국들(미국, 중국, 러시아)이 역내 핵무기 비보유국들(일본, 남북한, 몽골)에 핵무기를 선제 사용하지 않고 안보 위협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대신 비핵국가는 핵무기를 개발·보유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유엔이 이를 보장하는 조약 형태로 담보하자는 제안이다. 이를 위해 미·중·러와 남·북·일 6개국 안보정상회의를 제도화하는 등 포괄적 동북아 안보구상을 만들어 그 틀 안에서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와 한반도 비핵화를 동시에 추진하자는 것이다.

추모제 전날 나가사키 시내에서는 홍익표 의원을 포함한 한국 쪽 여야 의원 4명, 하라구치 가즈히로 중의원 의원 등 일본 쪽 4명이 ‘P3+3 동북아 비핵무기지대조약’을 추진하는 국제의원연맹 발기 모임을 진행했다. 이들은 북한의 핵무장이 한반도뿐 아니라 일본에도 실존적 위협이 되고 있으므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서는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가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데 뜻을 함께했다. 한·일 양국 의원들이 미·중·러와 북한 의회 지도자들을 초청해 6개국 의원연맹을 만들어나가자는 구체적 실행방안도 마련했다.

기존의 핵 억지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핵확산을 방지하고 핵무기를 감축하자는 일본 정부, 핵무기 폐기만이 살길이라고 강조하며 동북아 비핵무기지대화와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주장하는 나가사키 지방정부와 시민사회단체. 이들은 각각 오늘날 일본이 핵문제에 관해 가진 두개의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간극은 언뜻 좁히기 쉽지 않을 만큼 커 보인다. 그러나 77년 전의 나가사키는 묻는다. ‘이 비극적 도시가 인류 최후의 피폭지로 남을 수 있는가’라고.

때마침 뉴욕에서는 10차 핵확산금지조약(NPT) 검토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넘어 핵무기 감축 및 핵군비 경쟁의 예방(6조), 비핵무기지대의 확대와 내실화(7조), 그리고 엔피티로부터의 회원국 이탈 방지(10조) 등 중요 의제의 실질적 진전을 기대해본다. 제2, 제3의 나가사키는 반드시 막아야 할 인류의 재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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