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실리콘밸리] 박원익 | 더밀크 뉴욕플래닛장
“우리는 몇년 동안 승계 계획을 진행해왔습니다. 수전이 이 역할을 맡을 준비가 돼 있다고 확신합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옛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7일 “오는 11월 초 수전 리가 메타의 새로운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승진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기존 시에프오였던 데이브 웨너는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자리를 옮긴다.
올해 36살인 수전이 시에프오 자리에 오르는 것을 두고 투자업계에서는 미국 증시 시가총액 8위(18일 기준) 메타 같은 대기업이 다른 기업 시에프오 출신이 아닌 인물을 시에프오 자리에 앉히는 일은 흔치 않다는 반응이 나왔다. 실제 구글 모회사 알파벳의 시에프오인 루스 포랫은 뉴욕 월가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서 5년간 시에프오를 지낸 뒤 알파벳 시에프오를 맡았고, 애플 시에프오 루카 마에스트리 역시 애플에 합류하기 전 제록스와 노키아의 시에프오를 지냈다.
실리콘밸리 테크업계 역시 이번 인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미국 대표 지수인 에스앤피(S&P)500 소속 상위 25대 기업 시에프오 가운데 여성은 단 5명뿐이라는 이유에서다. 수전이 11월에 승진하면 여섯번째 여성 시에프오가 된다. 실리콘밸리 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에 따르면 에스앤피500 소속 상위 25대 기업 시에프오의 평균 연령은 54.7살이며 40살 미만은 전기차업체 테슬라의 잭 커크혼이 유일하다. 수전이 11월 메타 시에프오 자리에 앉게 되면 두번째 40살 미만 시에프오이자 최연소 시에프오가 된다.
확실한 건 그녀가 회사 안팎에서 능력을 인정받아왔다는 사실이다. 수전은 스탠퍼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를 거쳐 2008년에 페이스북 재무팀에 합류했다. 2012년에 진행된 페이스북 기업공개(IPO) 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2016년부터는 재무팀 임원(VP Finance, 상무급)으로 일해왔다. 비록 시에프오 경험은 없지만, 페이스북 재무팀에서 중요한 성과를 보여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데이비드 웨너 현 메타 시에프오는 “수전은 지난 14년 동안 재무팀의 리더였다. 페이스북과 현재 메타의 성장,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그녀를 치켜세웠다.
이번 인사가 ‘경영위기 상황’에서 이뤄졌다는 점도 큰 의미가 있다. 메타는 지난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처음으로 전년 대비 분기 매출 감소를 기록했다. 순이익은 1년 전보다 36% 급감했고, 주당순이익도 1년 전에 못 미쳤다. 광고매출 감소, 가상현실(VR) 사업부 손실 지속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최연소 여성 시에프오라는 카드를 꺼낸 셈이다.
메타의 이번 결정은 과감하고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전한 길보다는 잠재력에 베팅하는 스타트업 정신이 아직 메타에 남아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엔지니어 중심의 실리콘밸리 기술기업의 환경, 남성이 주도하는 기업 지배구조 속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셰릴 샌드버그라는 걸출한 여성 경영자가 이룩한 조직문화가 메타가 이런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광고사업 중심의 페이스북 제국을 건설한 그녀는 “리더의 압도적 다수가 남성인 세상을 바꾸려면 여성이 더 나서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말하는 등 꾸준히 여성의 리더십을 강조해왔다. 8월1일부로 최고운영책임자(COO)직을 사임했지만, 그녀가 심은 조직문화의 디엔에이(DNA)는 여전히 메타에 흐르고 있었다.
테크기업의 흥망성쇠를 취재하다 보면 기술 못지않게 조직문화가 중요하다는 걸 목격하게 된다. 기술기업 역시 사람이 ‘운영’하며, 미래를 바꾸는 혁신 역시 결국 사람에 의해 실행되기 때문이다. 메타의 이번 결정이 좋은 결과로 이어져 업계 전반에 신선한 자극이 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