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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중산층의 집짓기, 로망과 욕망

등록 2022-08-23 18:09수정 2022-09-15 23:30

집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를 갖는 일이다. 그 집이 속한 세계의 일부를 가지면 그 세계 전부가 달리 보인다. 자가소유계급이 보수화되는 이유다. 집을 짓는다는 건 어떻게 같고 다를까? 자가소유라는 점은 같다. 그만큼 지킬 게 많아진다. 차이도 있다. 집을 짓는 딱 그만큼은 세계를 짓게 된다. 아파트가 소유자의 욕망을 실현한다면, 단독주택은 거기에 약간의 로망 실현도 덧붙인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조형근 | 사회학자

4월 말에 시작한 집짓기가 사실상 끝났다. 지난 금요일 오전에 입주청소가, 오후에 대강의 조경공사가 끝났다. 사소한 마무리 공정들이 조금 남았고 이사는 한참 뒤 일이지만, 사람이 살 만한 집이 됐다.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두었더니 훌륭한 작업실이 됐다. 당분간 두집 살림이다.

일하던 이들이 모두 떠난 금요일 오후, 혼자 새집에 있는데 폭우가 왔다. 장대 같은 빗줄기를 뚫고 출판사에서 퀵 배송으로 보내준 내 신간이 도착했다. 인쇄소에서 갓 나온 책들을 새집의 첫 택배로 받았다. 직장을 그만둔 지 2년 반 남짓 지나서 책을 내고 집을 지었다. 철들고 세상 물정 알게 된 뒤에 정원 딸린 단독주택에 사는 꿈을 꿔본 적이 없다. 엄두를 내본 적이 없으니 로망이라고 하기조차 어렵다. 지난 금요일, 나는 그 로망을 이룬 사람이 됐다.

지금 사는 수도권 외곽의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이 8년 반쯤 전. 재계약 때마다 치솟는 서울 전세가를 감당하지 못해 탈진 상태였다. 여기 온 것도 운이 좋았다. 수도권이라고는 해도 외곽인데다 개발 중에 금융위기로 큰 타격을 입은 곳이었다. 그래도 애초 분양가는 엄두를 낼 수준이 아니었다.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으며 미분양 단지들이 나왔다. 와 보니 허허벌판에 선 아파트였다. 신도시가 아니라 ‘신시골’ 같았다. 대폭 할인가라 서울 전세금에 조금 보탰더니 전세살이 불안과 이별할 수 있었다. 출퇴근 시간 길어져 몸은 힘들어도 맘 편하게 살게 되어 좋았다.

그리고 우연히 동네살이가 시작됐다. 동네살이의 중심은 아파트촌이 아니라 인근의 단독 및 다세대주택 지구다. 이런저런 가게들, 모임 장소들이 있고, 담장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다. 거기서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며 놀다 보니 우리 동네처럼 친근해졌다. 예쁘고 소박하게 단독주택 짓고 사는 이들과 어울리면서 시나브로 새로운 로망이 생겼다. 저런 집 지어 살고 싶다는.

단독주택 사는 이들이 말렸다. 여러모로 불편하고 아파트가 최고라며. 그런 당신들은 왜 집을 지었냐고 물으면 웃었다. 한 이웃은 단독주택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파트에선 아침에 일어나면 얼른 씻고 먹고 출근하는 게 전부잖아요? 여기선 아침에 깨어나면 일단 마당으로 나가요. 정원도 걷고 꽃하고 나무에 물도 주죠. 그 5분, 10분이 천국 같아요.” 또 누군가는 말했다. “담장이 낮으니까 지나가다 서로 보게 돼요. 눈인사만 할 때도 있고, 같이 차 한잔할 때도 있고. 그러다 밥도 먹고 술도 먹고….” 굳이 약속한 이벤트가 없어도 이웃생활이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로망은 부푸는데 희망은 멀어졌다. 우리 아파트를 팔아봐야 땅값도 치르기 힘든데 직장까지 그만뒀으니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이 외진 동네까지 부동산값 폭등의 물결이 닥치며 느닷없이 사정이 변했다. 단독주택 쪽 택지도 조금 올랐지만 아파트 폭등과는 차이가 컸다. 덕분에 아파트를 팔면 얼추 땅 사고 집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지난해 초 땅을 사고 올해 집을 지었다. 아파트도 팔려서 이제 이사만 남았다. 글로는 옮기기 힘든 행운들이 겹쳐서 가능한 일이었다. 나에게 이런 행운이 겹치니 두렵기까지 하다. 부동산값 폭등으로 많은 이들이, 집 없는 이웃들이 고통받던 때 나는 단독주택 건축이라는 중산층의 로망을 실현하게 됐다. 물론 대가가 없지는 않다. 단독주택은 집값이 오르기를 기대해선 안 된다. 이번에 얻은 엉겁결의 이익 따위는 앞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마음만은 더욱 완연한 중산층이 된 것 같다. 나는 그 욕망의 레이스에서 확실히 빠져나왔다는 자부심 섞인 안도감 같은 것 말이다.

집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를 갖는 일이다. 그 집이 속한 세계의 일부를 가지면 그 세계 전부가 달리 보인다. 자가소유계급이 보수화되는 이유다. 집을 짓는다는 건 어떻게 같고 다를까? 자가소유라는 점은 같다. 그만큼 지킬 게 많아진다. 차이도 있다. 집을 짓는 딱 그만큼은 세계를 짓게 된다. 아파트가 소유자의 욕망을 실현한다면, 단독주택은 거기에 약간의 로망 실현도 덧붙인다. 집 가진 평범한 중산층일 뿐이지만, 무언가 자기만의 의미를 집에 부여하고 투영할 수 있다. 소유욕을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포장하고픈 또 다른 욕망일 수도 있겠다. 다 갖고 싶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 결과가 지금의 집이다.

우선 작은 집을 콘셉트로 삼았다. 건평 72.7㎡(22평). 보기에 따라 그리 작은 집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건폐율 10.3%라고 하면 아는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덕분에 건축비를 크게 아꼈다. 집이 작으니 욕조 포함 여러 편의시설이 사라졌다. 소파도 없어지고, 수천권의 장서도 절반 아래로 줄여야 한다. 불편한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대신 큰 마당이 생겼다. 잔디밭, 주차장 따위를 만들고도 꽤 넓은 터가 남아 텃밭으로 가꾸기로 했다. 남의 텃밭농사도 즐거워하던 처는 지금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

우리 집을 지은 시공 책임자는 바로 앞집에 사는 이웃이다. 본업이 있지만 자기 집을 직접 지었고, 취미 삼아 다른 작은 집도 지었다. 취미를 전업으로 바꾸려던 참에 우리와 이야기가 됐다. 그에게 다 맡겼다. 집 지으면 10년 늙는다는데 신뢰가 깊으니 오히려 유쾌한 경험이 됐다. 공정마다 여러 팀의 노동자들이 수고해줬지만, 종종 이웃들이 일손을 보탰다. 이웃이 지어준 집도 새집의 콘셉트다. 여기서 이웃살이를 하게 된다.

이렇게 집짓기의 윤리적 의미를 꿈꾸며 열중하던 와중에 큰 물난리가 났다. 집은 비 한 방울 새지 않고 튼튼했다. 서울에서는 반지하에 살던 세 가족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났다. 내가 여기로 이사 오기 전 20년 이상 살던 동네다. 거기 살던 동안 나는 대부분 달동네 꼭대기에 살았다. 침수 걱정은 없었다. 늘 내려가 평지에 사는 꿈을 꿨다. 내려가다 보면 더 내려간 반지하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난 금요일, 막 지은 집에 혼자 앉아 갓 인쇄되어 나온 내 신간을 펼쳐 읽었다. 서문의 마지막은 1980년대 말, 사당동 철거촌 투쟁에서 백골단과 철거용역이 진압할 때 도망치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부끄럽게 도망친 나는 이제 정원 딸린 단독주택을 가진 완연한 중산층이 됐다. 중산층인 채로 양심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건 좋은 일이다. 양심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한 세상이 집 밖에 있다. 착한 사람들이 모자라서 세상이 이렇게 모진 것은 아닐 것이다, 불편한 말, 위험한 정치가 필요한데 집이 너무 편안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밖에서는 억수같이 계속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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