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 기회의 사다리를 그런대로 잘 오른 편에 속한다. 학력고사 때 교과서 바깥 지문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우리 집에 한국문학전집이 있었던 덕분이다. 안 읽었으면 소용없었겠지만, 아예 없었다면 읽을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내가 기회의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많은 또래 아이들은 사다리 앞에 서 보지도 못했다.
조형근 | 사회학자
“모두 눈 감고 머리에 손 올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사장에 감독교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책상 위에 1교시 국어 시험지 놓이는 소리가 들리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시작!” 드디어 눈을 뜨고 시험지를 봤다. 첫 지문을 보는 순간 시쳇말로 멘붕에 빠졌다. 교과서 밖에서 지문이 나온 것이다. 학력고사 시절, 교과서 외 지문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예상 못 한 사태에 여기저기서 낮은 탄식이 흘렀다. 내 심장도 쿵쾅댔다. 그런데 내용이 익숙한 것이 아닌가? 즐겁게 읽었던 김유정의 단편소설 중 일부였다. 그 순간 하늘이 돕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이 솟았다. 4교시를 망쳤지만 어려웠다던 국어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덕에 만회됐다. 수십년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출신 대학이 사회 계층과 위신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세상이다. 대학 입시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고, 입시 공정성이 교육개혁의 핵심 사안이 된다. 지난주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다.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메시지가 넘쳐났다. 말은 따뜻하지만 현실은 차갑다. ‘승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촘촘한 대학 서열의 사다리는 위로 갈수록 좁고 가파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상승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탄식이 가득하다. 예전에는 어려운 환경에도 제힘으로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합격하고 계층 상승하는 사례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어렵다고 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경제학자 주병기는 소득 하위 20%인 부모를 둔 사람이 소득 상위 20%에 올라설 확률의 관점에서 ‘개천용 기회 불평등 지수’를 산출한 바 있다. 이 지수가 1990년 19.79에서 2016년 34.82로 높아졌는데, 기회 불평등이 대략 두배 가까이 심해졌다는 뜻이라고 한다.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무너진 교육 사다리를 다시 세우겠다”고 약속했고, 윤석열 대통령도 “청년의 자산 형성을 지원하여 끊어진 계층 이동 사다리를 다시 놓겠다”고 공약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화끈했다. 논란을 감수하며 “사시 부활, 정시 확대로 계층 이동 사다리를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서울런을 통해 계층 이동 사다리를 다시 놓겠다”는 오세훈 서울시장도 마찬가지다. 공공 재원으로 사교육을 지원한다는 희한한 발상이다. 끊어진 상승 이동의 사다리를 다시 세우겠다는 약속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내로라하는 서구 정치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노동계급과 결별한 제3의 길 노선으로 유명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영국 사회를 기회의 사다리를 타고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중산층 사회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의 빈민지역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모든 청소년에게 최대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기회의 사다리를 통해 저소득층 청소년들이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하자.”
대부분 정치지도자가 끊어진 사다리를 다시 세워 누구나 오를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도 불평등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확대된다. 왜 그럴까? 정치인은 전부 거짓말쟁이라서 실제로는 사다리 끊기에 앞장섰기 때문일까? 너무 냉소적인 결론이다. 이참에 아예 발상을 바꿔보면 어떨까? 우리의 노력이 사다리 세우기로 모일수록 거꾸로 불평등이 더 심해지는 건 아닌지.
영국 사회에서 진보좌파의 지향이 상승의 사다리 세우기로 모이던 1950년대 후반, 좌파 문화연구자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사다리야말로 부르주아적 발상의 완벽한 상징이라며 반기를 들었다. 사다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오를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장치다. 당신은 사다리를 혼자 올라간다.” 그렇게 개인적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사회의 노력이 집중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첫째, 공동체를 개선하려는 공동의 임무가 약화하고, 둘째, 수직적인 위계질서의 관념이 더욱 정당화된다. 사다리는 기회의 평등을 약속하지만, 그 대가로 사회는 분열되고 불평등이 심화한다. 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다리는 시대의 유행어가 됐고 기회평등론은 대세가 됐다. 결과의 불평등을 축소하자고 주장하기가 부담스러운 정치인들이 저 말을 애용한다.
사다리와 함께 곧잘 동원되는 ‘같은 출발선’의 비유도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경주를 시작한다. 그래서 ‘공정한 경쟁’이다. 출발 신호 이후의 일은 개인 책임이다. 선두와 꼴찌 사이가 많이 벌어진다고 문제 삼지 않는 것처럼 결과의 불평등에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
실제의 세계에서는 같은 출발선이라는 발상 자체가 허구다. 같은 출발선에서 누군가는 스포츠카를,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출발한다. 누군가는 제 발로 달려야 한다. 때로는 부모까지 업은 채. 노력하면 된다고? 사실은 노력할 기회조차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이 격차를 정말로 없애거나 최소화하려면 결과의 불평등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기회평등론이 진지해지면 결과의 평등론과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류 정치인들이 한사코 외면하는 진실이다.
나는 저 기회의 사다리를 그런대로 잘 오른 편에 속한다. 생각해 보면 학력고사 때 교과서 바깥 지문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우리 집에 한국문학전집이 있었던 덕분이다. 안 읽었으면 소용없었겠지만, 아예 없었다면 읽을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내가 기회의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많은 또래 아이들은 사다리 앞에 서보지도 못했다. 대학 진학이 크게 늘어난 1980년대 말에도 2년제까지 합친 대학 진학률은 30% 남짓에 불과했다. 교과서 바깥 지문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그만큼 ‘특권’인 셈이다.
우리 앞에 두갈래 길이 놓여 있다. 하나는 서로 연대해서 불평등 자체를 줄이는 길이다. 또 하나는 각자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길이다. 각자도생의 무한 레이스를 펼치는 길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 사회의 개혁 담론은 사다리의 이미지 주변을 맴돌았다. 그사이 한국 사회는 그 사다리를 오르려고 다투는 각자도생의 수직적 불평등 사회가 됐다. 연대도, 민주주의도 허약해졌다.
이제는 버리자, 혼자서 오르는 사다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