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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들의 합, 우리들의 안전

등록 2022-08-25 17:53수정 2022-08-26 02:42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읽기]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돌도 무른다는 음력 6월 더위가 새벽까지 푹푹 찌던 7월 말이었다. 열다섯에서 열여덟살인 아이들 열한명이 용인에 있는 놀이동산 입구에서 얼싸안았다. 캐나다, 미국, 프랑스, 러시아에서 온 해외동포라고 불리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과 일주일을 보냈던 서울, 성남, 안동에 사는 아이들이다. 개장과 함께 광장을 채웠던 인파는 세면대 물 빠지듯 빨려 들어갔다.

폐장을 알리는 예고가 나오고, 5분마다 인원점검을 하며 한 덩어리로 놀던 아이들은 귀갓길에 올랐다. 버스정류장은 여러 갈래로 늘어진 행렬이 뒤엉킬듯 붐볐다. 한밤에 애먼 곳에 내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아이들은 길 가는 아주머니를 세워 어눌한 한국어로 서울행 버스를 타는 곳이 맞는지 물었다. 벼락같은 호통으로 돌아왔다. 쌍시옷과 쌍기역이 난무하는 찰진 욕설들이 한곳으로 돌진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A에게로. 타오르는 눈빛과 범벅된 호통의 마지막은 ‘너희 나라로 가! 이 ㅅㄲ야’였다. 한국계 부모를 둔 미국에서 온 아이가 ‘내 친구한테 왜 그래요’라고 따졌고, 또 다른 아이는 ‘인종차별 하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그 말이 사그라지던 아주머니의 욕을 살렸으나, A가 지하철을 타겠다고 떠나자 소란은 멈췄다.

그 아주머니는 왜 그랬을까? 늦도록 붐비는 놀이동산 고객들에게 질린 터였을까? 아니면, 신산하여 기진한데 지푸라기 하나가 얹혔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외국인 혐오를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머니 눈에 거슬렸던 아이는 한국 국적이다. 오히려 친구를 옹호했던 아이와 인종차별을 지적한 아이가 한국 국적이 말소된 외국인이었다.

A에게 당시 감정을 물었다. 자신은 호텔로 돌아갈 방법을 궁리하느라 긴장했고, 욕을 들을 때는 어떻게 멈추게 할지 당황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분노는 다른 사람에게 향했다고 했다. 가만히 쳐다보던 사람들에게로. 그들은 왜 부당함에 침묵하는지 질문이 일었고, 지금까지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자리엔 50여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청년이었고 중년도 끼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당혹감도 마찬가지다. 케이(K)-드라마에서처럼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으며,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린 젊은 여성을 기억하는 여자아이도 있다. 무엇이 관람자의 눈빛마저 침묵하게 했을까? 개인주의라고 설명해야 할까? 온종일 놀이동산에서 에너지를 쏟았기에 피로에 눌렸다고 해야 할까? 금전적인 불이익과 연결되지 않는 사소한 봉변이라 여겼을 수도 있다.

무엇이 큰일이고 무엇이 사소한 일일까? 스스로 묻고 묻다 보면 큰일이란 오로지 ‘나의 일’뿐이다. 내 일일 때 나와 당신은 꿈틀거린다.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당한 봉변이 한국 뉴스에 나오는 이유도 한국인에게 나의 일로 다가가기에 가능하리라. 그렇다면 과연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설마 청소년이라는 아이의 정체성보다 백인에 가까운 정체성이 더 선명하게 인식되어 외면받았을까? 그렇다면 이중 취약성을 갖는 약자인데….)

세계인이 국경을 넘어 섞이는 시대다. 코로나 위기가 그 속도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주민이 나의 터전에서 나를 엮는 경제망의 한 코를 담당한다. 이 시대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머무는’ 그곳의 안전일 것이다. 다르다는 이유로 닥칠 차별에 민감해야 할 이유이고 누군가의 난처함을 보살펴야 할 배경이다. 초로의 여성이 다르다고 여긴 아이를 윽박지를 수 있었던 배경엔 그래도 된다는 인식이 있었을 수 있다. 나이라는 문화적 지위로 누를 수 있었고, ‘너희 나라’라고 다수와 가르면서 구경꾼들 속에 자리한 한편이라는 생각을 작동시키는 효과를 만들었다. 구분은 차별의 시작이다.

인간에게는 편을 구분하는 본성이 있다. 이 본능이 인류를 살아남도록 작용하기도 했다. 낯선 대상을 경계하고 다른 피부색과 피에 곤두서게 했기에 질병과 침략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인간은 사고하는 동물이다. 이성을 동원해 관계를 넓혀냈고, 여분의 생산을 만들고 더 많은 인원이 평화롭도록 제도를 만들어냈다. 협력의 본성이 작동하여 길어진 오늘의 수명이다.

이제 우리는 재난이 끊이지 않는 새 시대를 맞았다. 편가르기 본성을 방치하기엔 ‘우리’의 안전이 위태롭다. ‘누구나’의 안전 속에 나의 안전이 있고, 개인의 삶이 모인 합이 오늘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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