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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사회권을 망각한 사회

등록 2022-08-28 18:14수정 2022-08-29 02:42

투병과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복지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수원 세 모녀’의 발인이 지난 26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원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투병과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복지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수원 세 모녀’의 발인이 지난 26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원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세상읽기] 류영재 | 대구지방법원 판사

범죄나 재해로부터 안전하고 건강을 해하지 않는 주거에서 안정적으로 살 권리(주거권), 위생적인 음식과 물을 섭취하고 질병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받으며 건강하게 살 권리(건강권), 경제적 빈곤 및 위험에 대비하여 각종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사회보장권)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이러한 권리가 존재한다. 이들 권리와 평등권, 노동권, 교육권 등을 가리켜 사회권이라고 부른다.

이주영 유엔 사회권위원회 위원의 연구(공저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역사적 변화 과정과 미래 발전 방향> 중 ‘시민권의 확장과 사회권 등장’과 ‘사회권 보장을 위한 국제적 노력’ 부분)에 따르면 사회권과 사회보장 정책은 자본주의 산업사회로 인해 탄생했다고 한다. 가족 내에서 자급자족하거나 지배계층의 원조에 기대어 또는 길드에 가입하여 살아온 사람들은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일을 하고 돈을 받는 임금노동자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삶의 기반을 제공해주던 가족, 교회, 길드 등이 쇠퇴했다. 공동체의 공백 상태에서 임금노동자들은 식량, 집, 의료와 같은 모든 것을 구매해야 했고, 돈이 없으면 내몰리다 죽었다. 살 수 없는 삶들은 곧 사회문제가 되었고, 혁명을 불렀다. ‘살 권리’를 만들고 살 수 있게 할 것을 사회의 책무로 정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인식이 새롭게 등장한 시민사회에 싹텄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 시기 채택된 인권선언과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에 ‘살 권리’, 즉 사회권이 등장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질병, 실업, 노령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시민의 삶을 보호하고 시민에게 의료, 교육, 주거, 고용에 대한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국가 개념이 생겼다. ‘극빈자’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대책으로서만 필요했던 ‘살 권리’의 개념도 확장되었다. 복지국가가 전세계로 확산되며 국가별 사회합의에 따라 구현은 제각각 달라졌다. 어느 국가는 복지국가의 역할을 가능한 한 좁혔고 어느 국가는 복지국가의 역할을 가능한 한 넓혔다. 이 시기를 거치며 ‘살 권리’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갖는 권리, 사회적 시민권으로 인정받게 된다. 한편, 국제기구는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과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거치며 사회권을 보편적 인권으로서 다루었다. 이러한 노력은 1966년 유엔 사회적, 경제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하 사회권규약)의 채택으로 이어졌다. 현재 국제인권규범 체계에서 사회권은 보편적 인권으로 인정받고 국가는 사회권을 가능한 한 충실히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권리를 의미하며, 시민과 비시민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 헌법은 사회국가 원리를 채택하고, 사회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한다. 유엔 사회권규약에는 법적 효력이 부여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보편적 인권으로서 ‘살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이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모든 자유는 경제적, 환경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어야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으므로 국가가 사회권을 보장하는 것은 곧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권이 시민권으로, 나아가 인권으로 승인받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이유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사회권 도입 이전 시대의 그것과 유사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다. 그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하고 사회보장제도가 갖춰진 사회다. 그런데 ‘공동체의 공백 상태에서 각자도생하다가 돈이 없어 내몰리는 죽음’이 반복된다. 그 원인으로 신청주의, 정보접근권 미보장, 지나치게 까다로운 사회보장 요건 및 절차, 모욕적인 가난 증명 과정 등이 지적된다. 나는 그 이전에 우리 사회가 사회권을 망각한 것 아닌지 묻게 된다. ‘가난으로 인한 생활고는 개인의 책임이고 복지는 시혜’라는 관점에서 제도가 설계되고 운용되는 것 아닌지. 시혜를 베푸는 입장에서 사회보장의 요건과 내용은 도식적으로 정하고, 자격심사는 엄격히 실시하는 것 아닌지.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여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보다, 자격을 심사하고 거짓말을 하는지 따져보아 부적격자를 거르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 아닌지. 그 인식 아래 가난은 수치가 된 것 아닌지. 만일 그렇다면 잊힌 사회권을 불러올 차례다. 우린 모두 ‘살 권리’를 갖는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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