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이현석의 팔레트] 해변의 노인

등록 2022-08-28 18:16수정 2022-08-29 02:39

지난달 31일 오전 강원 강릉시 경포해수욕장에서 피서철 임시 고용된 환경미화원들이 밤을 새운 피서객들 사이에서 백사장 청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오전 강원 강릉시 경포해수욕장에서 피서철 임시 고용된 환경미화원들이 밤을 새운 피서객들 사이에서 백사장 청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현석 |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며칠 전 일이다. 외래를 보다가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대기석에 노인 일고여덟명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노동자가 주요 대상층인 과 특성상 이른바 ‘생산연령’에 속하는 사람이 많이 내원하기 마련인데, 그곳에 앉아 있는 분들은 못해도 70대 이상으로 보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대기석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소지는 모두 인근의 섬. “어떻게 오셨나요?”라고 묻자 “어떻게 오기는, 배 타고 왔죠”라고 답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쩐 일로….” “거 뭐, 공공근로 하려면 여기서 무슨 검사 받아야 한다고 해서….” “아, 그러시군요.” 맞장구를 친 나는 차트에 적힌 현재 직무를 살핀다. 주된 업무는 해변 청소. 일주일에 세번, 오전 반나절 동안 일한다. 과거 직업력을 물어보니 대체로 섬에서 농사를 짓고 조업을 하면서 지냈다.

노화는 숙명인바, 농사를 짓기도 어렵고 배를 타기는 더욱 어려워진 이들에게 공공형 노인일자리는 생활의 방편인 동시에 교류의 장이다. 나는 말을 잇는다. “휴가철이라 해변에 쓰레기가 많겠네요?” “말도 마쇼. 주말에 외지 사람들 왔다 가면 수두룩합니다.” “치우려면 힘드시겠어요.” 당연히 힘들지 않을까, 지레짐작으로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르다. “아이고, 힘들지”라는 분도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하는 거죠.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하고 얼마나 좋아”라는 분도 있고, “쉬엄쉬엄하다 보면 시간 잘 갑니다”라는 분도 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대답은 “자손들 살 세상인데 우리가 이거라도 해야지”라는 말.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이 일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세상에 기여하는 마지막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이 공공형 노인일자리가 꾸준히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이 사업은 ‘공익활동형’, ‘사회서비스형’, ‘민간형’ 세가지로 나뉘는데, 관에서 직접 일자리를 제공하는 공익활동형과 사회서비스형이 80%를 차지한다. 지금과 같은 구조를 민간형이 중심이 되도록 바꾸겠다고 하면서 정부가 든 개편 근거는 다음과 같다. 관에서 직접 제공하는 일자리는 단기 알바에 가까운 ‘질 낮은 일자리’이다. 이런 ‘질 낮은 일자리’가 노인 고용지표를 높이는 착시효과를 낸다. 노인들의 직업 성취감을 위해서라도 적성과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시장 중심의 민간형 일자리로 재편되어야 한다.

꽤 설득력 있는 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민간형 일자리는 대상자가 매장을 운영하면서 물건을 생산·판매하거나, 민간기업에 인턴 등으로 취업하거나, 정부가 고령자 친화도가 높은 기업에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민간형에서 제공하는 일자리는 필연적으로 공공형이나 사회서비스형에 비해 높은 노동 난도와 많은 노동시간을 요한다. 이렇게 되면 섬에서 단체로 왔던 노인들처럼 70대 이상 고령자의 경우, 그보다 인지능력과 체력이 좋은 60대와의 경쟁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보자. 노인일자리 사업은 이윤 추구에 목적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공적부조의 일환일 텐데, 정부 개편안처럼 민간형이 중심이 되면 지지자원이 더 필요한 고령층에게 외려 자원이 가지 않도록 만드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오랜 시간 동고동락했던 이웃들과 같이 해변을 돌아다니는 노인들에게 사회가 바라는 것이 수익 창출일 리는 없다. 오히려 이런 사업의 결실로서 사회가 진정 바라야 하는 것은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걱정하면서 바닷가에 버려진 한장의 비닐봉투를 줍는 마음, 그 자체가 아닐까. 그리고 이런 마음에는 시장 논리가 끼어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이재명 1심 판결에 과도한 정략적 대응 자제해야 1.

[사설] 이재명 1심 판결에 과도한 정략적 대응 자제해야

[사설] 한반도 안보 위해 ‘중국 레버리지’ 적극 활용해야 2.

[사설] 한반도 안보 위해 ‘중국 레버리지’ 적극 활용해야

윤석열 대통령의 ‘4대 개혁’ 정신승리 [아침햇발] 3.

윤석열 대통령의 ‘4대 개혁’ 정신승리 [아침햇발]

[사설] ‘머무를 권리’ 절실한 미등록 아동, 한시 대책으론 안돼 4.

[사설] ‘머무를 권리’ 절실한 미등록 아동, 한시 대책으론 안돼

그 ‘불법’ 집회가 없었다면 [한겨레 프리즘] 5.

그 ‘불법’ 집회가 없었다면 [한겨레 프리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